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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덕이 왜 새로운 도덕이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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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윤미정 (222.♡.110.93)
    댓글 댓글 12건   조회Hit 23,003회   작성일Date 24-10-02 18:26

    본문

     

    There is nothing. 있다는 것 일까? 없다는 것일까?

    보통 There is nothing을 아무것도 없다고 해석을 한다. There is 는 있다이고 Noting 은 없는 것이다. 직역을 하면 Nothing 이 있다는 말이다. 없는 것이 아니고 Nothing 이 존재 한다는 뜻이되어 아무것도 없다와 다른 의미가 된다. 결국 있다는 반대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존재 하는 것이다.

     

    기존의 도덕에 불편함을 느껴 반대에 서는 것을 새로운 도덕라고 생각하지만 도덕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부도덕은 새로운 도덕이 아니다. 부도덕은 이전 도덕을 더 강조할 뿐 큰 틀에서 보면 도덕의 또 다른 이름이지 새로운 파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반대에 서는 것을 혁신이라고 착각하다. “있다에서 태어난 없다는 있다가 없어지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결국 도덕이 싫어 부도덕을 택해도 도덕 안에서 움직이는 꼴이다.

     

    새로움을 기존의 것의 부정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도덕을 없게 만들고 싶으면 도덕을 다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존재 하게 해야 한다. '없는 것의 존재'를 인지하고 기존의 '있음'을 초월하여 '새로운 없음의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기존 도덕의 반대이다. 도덕의 반대, 새로운 도덕은 지금의 도덕이 요구하는 질서와 규칙 자체를 넘어 기존의 것 그와 반대 되는 것이 섞여 전혀 다른 것이 되는것이 바로 진정한 부도덕이다. 하이데거의 "()“ 개념처럼 단순히 부정적인 '없음'이 아니라 존재론적 '열림(開放)'의 장으로서의 무가 진정한 무()이다. 많은 혁명가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망치를 들고 부수었다 착각하지만 오히려 더 기존틀을 더 견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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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들과 더 나누고픈 주제

    1. 이 그림은 아무것도 안그려진것일까? 흰색이 있는것일까?

    2. I know nothing. 은 안다는 것일까 모른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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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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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냉면님의 댓글

    동지냉면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오~ 재미있네요. 저도 일부는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새로운 가치는 기존의 도덕을 부정할 때만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적 체계가 무너졌을 때 창출될 때도 있죠.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있겠죠? 만약 자율주행 자동차 오류로 사고가 발생한다면 기존의 도덕적 판단 기준인 인간의 책임으로부터 모호해지니까요. 이는 기존의 책임 윤리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윤리적 판단 기준을 요구하게 만들죠. 다시 말해, 단순하게 도덕을 부정하는 게 아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무너진 도덕의 자리에 새로운 윤리가 생긴 것입니다.

    위 과정은 단순 도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도덕이 자리 잡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도덕을 없애거나 부정하려는 시도와는 다르죠. 기존의 도덕적 틀이 무너지고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점은 "기존의 도덕에 불편함을 느껴 반대에 서는 것을 새로운 도덕라고 생각하지만 도덕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부도덕은 새로운 도덕이 아니다." 이 부분인데요.
    성소수자 LGBTQ 는 부도덕적인 존재로 간주되었잖아요? 그런데 기존의 도덕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새로운 도덕적 질서가 만들어졌고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가 변화했죠. 이외에도 환경 보호와 기후변화, 성폭력 등등도 같이 바뀌었죠.

    다시 말해 기존의 도덕을 부정하는 건 새로운 도덕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부도덕이란 무엇인지 말하는 게 참 어렵죠. 크게 첫째로 도덕이 없는 상태로 볼 수 있고 둘째로 도덕의 반대편 또는 도덕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첫째의 예는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범죄를 부도덕함으로 정의할 수 있고요. 둘째의 예시로는 과거 마틴 루터킹 같은 인물이 주도했던 시민 불복종 운동 그리고 여성 참정권 운동 또한 그 당시의 법적,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부도덕이기도 하죠. 첫째의 예시는 칸트가 말하는 부도덕이고요. 둘째의 예시는 니체가 말하는 부도덕입니다.

    동지들과 더 나누고픈 주제

    1. 이 그림은 아무것도 안그려진것일까? 흰생이 있는것일까?
    저는 안 그려진 것이냐, 흰색이 있는 것이냐에 대해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자기만의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작품도 4분 33초동안 무음으로 채워져 있잖아요? 저는 그냥 예술적 표현 정도로 보고, 관람자가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것도 안 그려진 것이다.> 쪽에 서고 싶어요. 다시 말해, 육안으로만 봤을 때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아,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는 작품!!!!!

    2. I know nothing. 은 안다는것일까 모른다는 것일까?
    안다는거죠.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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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냉면님의 댓글의 댓글

    동지냉면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도덕이 없는 상태의 첫번째 예시를 이상하게 적었네요? 이건 단순하게 전쟁 상태,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생존하기 위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도덕적 기준이 사라지거나 적용되지 않는 도덕적 부재 상태에서 발생하는 부도덕의 예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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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미정님의 댓글의 댓글

    윤미정 아이피 (116.♡.169.55) 작성일 Date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점은 "기존의 도덕에 불편함을 느껴 반대에 서는 것을 새로운 도덕라고 생각하지만 도덕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부도덕은 새로운 도덕이 아니다." 이 부분인데요.
    성소수자 LGBTQ 는 부도덕적인 존재로 간주되었잖아요? 그런데 기존의 도덕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새로운 도덕적 질서가 만들어졌고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가 변화했죠. 이외에도 환경 보호와 기후변화, 성폭력 등등도 같이 바뀌었죠.

    -> 새로운 도덕은 기존의 도덕을 부정한 것이 아닌 도덕의 기준을 부정한것입니다.
     
    수학적으로 표시 하면 도덕=M 도덕의 부정, 부도덕=~M 으로 표시해봅시다

    1. ~M 자체가 M의 존재를 전제 하고 있기 때문에 ~M은 M이 없으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도 먼저 천사가 존재하고 그 천사가 타락해서 악마가 되지 악마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타락해서 천사가 되지 않아요. 악은 선이 존재 해야 악으로 존재해요.

    2. ~M을 부정하면 결국 M이 됩니다. 이중부정은 긍정이되죠. 새로운 도덕을 만들겠다고 ~M을 부수면 오히려 M이 강조 됩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도 비슷한데요 서로를 부정하면 테러가 더 대범해지고 자살폭탄이 되고 어린아이 자살폭탄이 되며 서로를 키웁니다.

    3. M:~M 에서 M과 ~M을 나누는 저 : 땡땡을 기준이라고 하면 새로운 도덕은 저 기준을 부수는것이지 ~M을 부수는게 아닙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리는 니체가 부수고 싶었던건 ~M아니라 저 : 기준이에요. 새로운 도덕은 도덕을 부정해서 만들어지는게 아니고 기준을 부정해서 만들어 집니다. 기준이 바뀌니 기존의 도덕이 자연스럽게 부정되는것입니다.

    4.  새로운 도덕=D로 수식화 하면 D=~M∪E 로 나타 낼수 있는데
    E는 기존의 도덕이나 부도덕과는 완전히 다른 요소로, M:~M에서 기준이 부서진 상태로, 기존 도덕과 반대되는 것들이 융합되어 새롭게 창조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M도 아니고, ~M
     아닌 완전히 새로운 상태의 집합을 의미하며 기존의 "있음"과 "없음"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도덕적 질서가 열림의 장으로서 존재하게 됨을 나타냅니다.
    D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M를 포용하여 새로운 도덕이 만들어 집니다. 새로운 도덕적 질서가 만들어 져서 기존의 도덕이 부정되는것이지 기존의 도덕을 부정하여 새로운 도덕 질서가 만들어 진게 아닙니다. 스마트폰이 생기니 삐삐가 필요없는것이지 삐삐를 부정해서 스마트폰이 생겨난 것이 아닌 것 처럼말이죠. 기존의 도덕적 틀이 무너지고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것이아니고 새로운 질서가 생기니 더 이상 기존의 도덕적틀이 무의미해 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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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냉면님의 댓글의 댓글

    동지냉면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재미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식이네요?
    사실 이건 생각 차이인 것 같아요. 저는 도덕과 부도덕을 대칭관계로 보지 않거든요.

    도덕(M) 부도덕(~M)이 되려면 두 관계가 양방향적으로 동일하게 성립되어야 하잖아요?
    관계 R이 두 요소 a와 b사이에 대칭이라면, aRb와 bRa의 관계는 동등해야 하므로
    = aRb--> bRa

    aRb는 bRa로 정의할 수 있지만, 비대칭적인 관계는 aRb가 성립해도, bRa는 성립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한쪽에서는 성립되더라도 반대로는 성립되지 않는 비대칭 관계는
    = aRb-->¬(bRa)

    만약 도덕이 M이고 부도덕이 ~M이라면, a∈M일 경우, b∈∼M으로 바꿔도 성립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서 선행을 배푸는 행동이 도덕적이지만 그 반대가 부도덕으로 전환되지는 않잖아요?

    앞서 정의하신 도덕(M) 부도덕(~M)이라는 대칭적 관계가 갖춰지려면 양방향 관계가 성립해야 하는데, 도덕과 부도덕의 경우 한 방향으로만 성립되는 경우가 있어요. 고로, 대칭성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도덕(M), 부도덕( ~M)의 전제에 동의하지는 않는거에요. 저는 이 둘을 비대칭 관계로 보고 있거든요.

    D= M∪~M∪E 라는 수식에서 E가 새로운 도덕을 나타내는 요소로 정의하셨는데요. E가 완전히 새로운 가치라면, 미정님이 정의하신 도덕(M)이나 부도덕(~M)과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수학적으로, D가 M과 ~M의 합집합에 기반한다고 보셨는데, 새로운 도덕(D)는 M이나 ~M과 상관없이 독립적인 요소(E)에 기반하여 완전히 새롭게 형성될 수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새로운 도덕이 반드시 M과 ~M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전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봐요.

    그런데 저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시도여서 놀랐습니다.

    1. 기존의 도덕을 부정하면 M이 강조된다.

    실제로는 부도덕(~M)을 부정할 때 새로운 형태의 도덕이 생겨날 수 있잖아요? 그런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있죠. 예를 들어, 종교적 도덕(M)을 부정한 세속주의적 가치관이 새로운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 낸 것처럼요. 이는 단순히 기존 도덕으로 회귀하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도덕적 틀을 형성했죠?

    2. 도덕의 기준을 부정하는 것이 새로운 도덕을 만든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아닌 경우는 자율주행 자동차로 함께 다뤘기 때문에 지나가겠습니다.


    3. 기존 도덕을 부정한 게 아닌, 도덕의 기준을 부정한 것이다.

    도덕적 기준만 부정한 게 아니라, 기존의 도덕을 부정한 것이라 생각해요. 도덕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기준도 함께 변형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성소수자(LGBTQ)에 대한 도덕적 시각은 기존의 도덕(M)을 부정해서 변화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도덕적 기준이 탄생했잖아요? 단순히 기준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기존 도덕의 부정 자체가 새로운 도덕적 기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마틴 루터킹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나 여성 참정권 운동도 기존 도덕 M을 부정한 것으로 새로운 도덕 질서를 형성했다고 보고 있어요. 저는 이 사례가 도덕 기준만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도덕 그 자체를 부정해서, 새로운 도덕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봐요. 이것도 관점 차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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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미정님의 댓글의 댓글

    윤미정 아이피 (116.♡.169.55) 작성일 Date

    생각했던  수식은 조금 더 복잡해서 최대한 간단하게 쓴거라 생략이 많습니다. 댓글이 올라가지 않네요 ㅜㅡ 나중에 오프로 이야기 나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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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도님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39.♡.46.238) 작성일 Date

    1. 이 그림은 아무것도 안그려진것일까? 흰색이 있는것일까?
    -> 이 그림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관람객이 있습니다. 의도 된 전시입니다. 의도가 반영된 작품이므로, 그려졌다고 주장하겠습니다.

    2. I know nothing. 은 안다는 것일까 모른다는 것일까?
    -> 앞뒤맥락이 없는 문장이라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너 백종원에 대해 뭘 알아?'라는 질문에 '나는 아무것도 몰라'라고 답한다면, 질문이 둘러놓은 울타리에서 답을 하기에 해당 울타리를 부정함으로서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그러나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문장은 '아는지 모르는지도 몰라야'하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합니다. 고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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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돌맨님의 댓글

    벽돌맨 아이피 (211.♡.181.17) 작성일 Date

    첫 번째로 도덕과 부도덕에 대해서
     도덕의 반대되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를 무시하고 단순히 도덕의 반대인 부도덕은 새롭지 않다. 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 주시면 멍청한 제가 더욱 이해가 빠르겠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남을 속이지 말자!" 도덕입니다. 반면에 "남을 속이고 싶다!"라는 생각은 부도덕이죠? 그렇다면 "남을 속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인해 어떤 행동과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남을 속여 사기를 치는 사람, 마술을 하는 사람,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미술을 하는 사람 등 부도덕으로 많은 행동과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죠. 이처럼 부도덕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 남을 속이지 말자! 라는 도덕에서 사기, 마술, 미술 등이 파생되는 게 쉬울까요? 남을 속이고 싶다! 라는 부도덕에서 파생되는 게 쉬울까요?

    두 번째로 "없는 것을 존재 하게 해야 한다"에 대해서
     말은 그럴싸해 보입니다. 그러나 공허한 말입니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창의는 은유에서 나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은유는 없는 것을 존재 하게 하는 행위일까요? 은유는 간단히 말해서 A는 B다. B는 C다. 따라서 A는 C다. 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문장에서 "내 마음" -> 깊고 넓음, "호수" -> 깊고 넓음, 따라서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창의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개념화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도 사실은 휴대전화기기와 MP3를 합친 물건에 불과하죠.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한 게 아닙니다. 따라서 “새로운 도덕은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멋진 말이지만 공허한 말일 뿐, 현실에서 적용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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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마술과 미술이 "남을 속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만 파생하지는 않습니다.

    "아이에게 웃음을 주고 싶다"
    "이 광경을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마술과 미술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남 속이는 일을 본인의 소명으로 삼는 마술사도 있겠지만
    아이에게 웃음 주는 일을 소명으로 삼고 소명을 이루는 방법으로 속임수를 사용하는 마술사도 있지 않을까요.
    이때의 속임수는 마술사의 근본적인 욕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 줄 동력을 찾고 싶으면
    내 욕망과 소명에 집중하면 될 뿐
    도덕이나 부도덕 따위의 기준에 스스로를 미리 얽매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술사로 거듭나는 게 내 소명이라면 다른 누가 부도덕이라 하든 어쩌든 속임수를 마술의 재료로 사용하면 됩니다.

    남 속이는 일이 소명인 사람은 (아이에게 웃음 주는 일이 소명인 사람이 그렇듯) 마술사나 화가의 껍데기에 스스로를 가둬 둘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속이고 싶다!"로부터 마술이나 미술이 파생하는 일은
    "남을 속이지 말자!"로부터 마술이나 미술이 파생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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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A는 B다. B는 C다. 따라서 A는 C다.'
    위의 세 단계는 은유가 아니라 A와 C가 처음부터 같았음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은유는 'A는 B다'와 'B는 C다'에 사용됐습니다.
    A와 B가 똑같지 않기에 각기 다른 이름이 붙었을 텐데
    서로 다른 A와 B가 같다고 선언했으니 은유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은유에서 등장하는 '깊고 넓음'은
    '내 마음'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특성 중 하나인 동시에
    '호수'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특성 중 하나입니다.

    "내 마음은 깊고 넓음이요"라는 문장과 "깊고 넓음은 호수요"라는 문장은 틀렸습니다.
    '내 마음'과 '호수'가 더 높은 층위에 있고,
    '깊고 넓음'은 더 낮은 층위에서 다른 특성과 얽혀 '내 마음'과 '호수'가 드러나도록 떠받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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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공허하지 않은 말은 없습니다.
    공허하지 않은 개념도 없습니다.

    '공허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목과 입과 코에서의 진동에 의존해 잠시 드러납니다.
    '공허하다'는 개념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비다"와 같이 '아무것', '없다', '텅', '비다'라는 다른 개념들의 조합으로부터 드러납니다.

    말도 개념도 생각(신경망의 활동)과 똑같지 않습니다.
    똑같지 않은 걸 같다고 선언한 채 사용하니 은유입니다.

    말도 없던 것이고, 개념도 없던 것이고, 스마트폰도 없던 것인데 드러나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목소리, 다른 개념, 휴대전화와 MP3)을 조합해 없던 것이 드러나게 만드는 어려운 일을 해내기에 선도자, 선도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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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민이님의 댓글의 댓글

    경민이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유를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은유에서 중요한 것은 둘을 연결하는 것이지. 층위를 구분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두 요소가 상징하는 공통적인 개념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게 은유지. 층위를 구분하는 게 은유인가요?
    물론 층위를 구분하는 게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유효할 수 있겠지만, 은유는 그게 아니죠?

    기본학교에서 더 많이 배워가시길 바랍니다. 다음 6기에 지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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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은유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없던 세계를 열어 내고자 하는 욕망 또는 소명입니다.
    은유를 내 윗층에 모셔 두고 숭배하며 살 수도 있지만
    내 아래층에 놓아 두고 내 욕망과 소명을 이루는 도구로 꺼내 쓸 수도 있습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079921
    은유는 기본학교보다도 위의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더 폭넓게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