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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언젠가 유일하게 있는 모임에 가서 어정쩡한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기억이 의존한다면 그리고 의도를 좀 더 명확히 하면 다음과 같을 수 있을 것 같다. > "저는 여러분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그것을 알고 싶음에도 말입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이 이상하고 심지어 일정방향을 유지 했던 분위기까지 헤치는 의도도 맥락도 결여된 것들이 현전함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매우 기이하다. > 존재, 이것은 철저히 청자들을 심지어 화자까지도 부정하는 위험한 기표다. 이것은 서양철학의 전통에 입각한 표현이다. > (그렇다고 그들의 전통에 그리 쉽게 젖어들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철저히 동양적이고 또 동양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는 서양의 학문에 기웃거리고 있다. > 이 기웃거림, 이 애매함, 이 모호함이 냉혹한 시간의식에 의해 철저히 비웃음 당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확실한 행동, 명확한 언어와 눈빛, 과감한 판단은 나에게 있어서 거리가 먼 것이다.) > > 존재 자체 즉, 있음을 다루는 것은 가장 깊숙히 들어간 고도의 사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있다."라고 하나의 명제로 환원되는 삼라만상의 존재자들은 관념속의 그물에 하나도 빠짐없이 현현하는 듯 하다. > '왜 도대체 없음이 아니고 차라리 있음인가?" > Warum ist überhaupt seiende is, nicht vielmehr Nichts? > 다시말해, "왜 모든 것은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또 "비존재는 철저하게 존재 그 자체에서 나타난다."라고 덧붙힐 수 있겠다. > 모든 것은 있음에도 있지 않음을 열어둔다. 그것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있기에 없음으며 없기에 있음이 가능하다. 모든 언어적, 기능적 연관에서 빠져나와 있음 자체의 있음이 가능하다. > 존재는 오직 존재함의 소거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소거는 철저히 비존재 직전까지만 가능하며 비존재는 존재와 다른 것, 대척점이 아닌 아닌 상보적이며 차라리 존재는 비존재다. 왜냐하면, 존재와 비존재의 이분법은 언제나 제 3자인 존재에서 가능한 존재자와 혼동되기 때문이다. > > 다시 언급해보자 > "왜 모든 것은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 > 응당 그래야하지만, 이 문장은 이미 존재자에서 부터 탈의미화된 채로 시작된다. 하지만, 존재자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자는 이미 은유된 세계를 다시 은유한 것이지 은유 그 자체는 아니다. 은유 차라리, > '시작詩作'이 존재와 가장 가깝다. > 최소한 존재의 집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시적 언어의 그 역능은 의미 있음에서 벗어나 의미없음으로 존재를 지켜낸다. 의미 있음은 존재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 존재는 파괴자다. 옛날에는 창조자의 창조적 행위였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선 파괴 또 파괴를 통해 창조적 토양으로 지면을 확보한다. 이미 존재는 존재자로써 들어나며 존재는 비존재와 존재자 사이에서 언제나 거기에 서 있다. > 의미의 파괴와 창조, 그 시작점은 어떠한 방향성과 무게감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다른 식으로 말하면, 없음에 형식으로 나타나는 있음인 '공백'(x ∈ ø) 이다. > 존재를 다룰 때조차 수학은 그것의 역능이 언제나 기술을 단단히 지지해주는 것으로 즉, 욕망을 철저히 추동하는 역할로 다시말해 그 '쓸모'가 들어나는 듯 하지만, 철저히 순수사유로써 의미가 배제된 채로 존재(공백)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 (객관성과 타당함을 맹신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시험당한다.) > > 존재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다시 시작함을 요구한다.그것은 언제나 위기요, 절체절명과 같다. 그만큼 사유 이전에는 있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반증이다. > 존재사유 이전에는 의미의 소멸 자체에서 피어나는 것. 즉. 허무주의를 낳는다. >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적 허무주의를 포착하고 있는데, (의미의 소멸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한국적'을 붙여보았다.) 그 팽배함의 자연스러운 현상은 위태롭지만 그만큼 더욱 가능성이 넘쳐나는 역동적 상황으로 나타난다. > 서양의 존재론과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는 극동반도의 존재자들의 존재의 운명은? > 그리고 존재에 대해 논하는 동시에 그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자의 분열상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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