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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3기]7 ∞ 9(공터에서-김훈)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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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송선형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07회   작성일Date 25-02-13 00:14

    본문

    ...7 9...[칠팔구]_(공터에서/김훈)

     

    송 선 형


    공터에서_요약

         마동수는 다채로운 단면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일제 강점기였고, 열 살 많은 형 마남수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 어느 날 마남수는 미 국회의원들의 행렬 소식을 듣고 그 장소를 찾았다가 순사에게 잡혀 남산경찰서에서 모진 매질을 당한다. 나름 지식인이었던 그는 상처를 치료한 후 잠적을 하는데, 후에 길림에서 한의원을 개업했다며 마동수에게 그리로 오라는 편지를 보낸다. 마동수는 형의 강요적 지원으로 상해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되지만 낙제를 거듭하다 결국 퇴학을 당한다. 그리고 형의 지원이 끊기자 생계를 위한 일을 하게 된다. 상해에서 만난 하춘파는 아나키스트로 기이하고 괴팍한 인물이었다. 하춘파는 마동수에게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맡겼는데, 그가 수행하던 임무는 지목된 목표와 배신행위에 대한 위협과 살인이었다. 의도치 않게 그의 일원이 되어 살던 어느 날 상해가 무차별 폭격을 당하자 그들은 흩어지고 마동수는 만주로 이동한다. 마동수는 그곳에서 약초와 관련된 일을 하다 아편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 중독은 그에게서 시간을 제거했다. 약에 취해 있던 어느 날 조선이 독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다시 고향의 땅으로 향하길 결심한다. 하지만 돌아온 서울에선 어머니의 흔적이 이미 사라진 후였다. 옛집 근처에 방을 얻고 생활하던 중 남과 북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자 결국 피난길을 나서게 된다.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고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은 시립 병원의 빨래였다. 그 일을 하다 홀로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이도순을 만나게 된다. 이도순은 흥남부두에서 남편과 젖먹이를 잃어버려 그들의 생사조차 모르던 상황이었다. 낙동강 빨래터에서 둘의 여정이 교차점을 이루자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그들은 하나의 삶으로 말려 들어간다. 축사가 개조된 피난민 수용소에서 한방을 쓰게 되고 부부가 된 적은 없이 몸뚱이로 두 자녀를 만들며 서먹한 가족을 이룬다. 마치 들풀들이 옆으로 번지듯이. 전쟁이 끝난 후 마동수는 다시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달과 지구가 이끌리듯 집으로 찾아올 뿐이었다.

         장남인 마장세는 어린 시절 슈사인보이였다. 미군의 주변을 배회하며 푼돈을 벌어 그 돈으로 허기를 채웠다. 미군이 던져준 잇자국이 난 초콜릿은 먼 미래와 닿은 자본주의의 맛이었다. 그는 최북단에서 군복무를 하다 베트남 전에 차출되었는데 제대하기 석 달 전 수색작전에서 무공이 인정되어 훈장을 받았다. 제대 후에는 퇴역 문관을 따라 바로 괌으로 떠났다. 섬 생활 6년째 되던 해 암투병을 하던 마동수가 홀로 방에서 죽은채 발견된다. 차남 마차세는 당시 상병의 신분으로 휴가를 나왔다가 홀로 아버지의 장례 치르게 된다. 아버지의 소식을 알았지만 가족과 엮이는 것이 늘 거북했던 마장세는 찾아오지 않는다. 단지 송금으로 자신의 빈 자리를 채웠다. 마동수의 장례식에 왔던 동지들은 마차세에겐 낯설고 난해하고 난감한 무리였다. 하지만 덕분에 아버지의 몰랐던 단면을 알게 된다. 마차세는 결혼을 빨리했다. 그의 아내 박상희는 그의 가족과는 달리 온기 있는 사람이었다. 취직이 쉽지 않고 생활도 녹록지 않았지만, 부부는 서로를 양해했다. 마차세는 생계를 위해 임시직으로 오토바이를 타며 배송 일을 하게 된다. 한편 마장세는 과거의 인연이 엮어낸 우연함으로 마차세와 엮이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횡령에 남다른 감각을 가진 오장춘이 있었다. 오장춘은 마차세의 고교 동창이자 같은 군부대 출신이다. 그는 마차세의 안정된 취업을 빌미로 형인 마장세에게 접근하여 사업적 이해관계를 도모하려다 후에 서로의 사회적 굴레가 되어버린다. 이 사이에는 또 다른 형제가 끼어있는데, 그중 동생이 김정팔로 마장세가 무공훈장을 받을 당시 전사한 군 동기였다. 사실 김정팔은 마장세에게 사살을 당한 것이었고 나중에 그 혐의가 드러나게 되지만 마장세에겐 현시점의 더 위법한 죄를 묻게 하여 그 일은 덮어진다. 이도순이 요양병원에서 외로이 죽고 마장세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오장춘의 죽음으로 마차세는 임시직으로 다시 배달 일을 시작한다. 괌에서 마장세의 아내로 소개되었던 린다는 미군과 한국 여성이 낳은 혼혈아였고, 그의 일을 돕던 시누크는 일군과 섬의 치누족 여성이 낳은 혼혈아였다. 그 둘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 사생아들로 섬으로 떠밀려온 살아남은 생명체들이었다. 마장세가 고국으로 이송되자 그들은 물고기들처럼 자연스럽게 섬의 더 깊은 곳으로 함께 헤엄쳐 갔다. 박상희는 옷 가게를 열었고 가게 이름을 누니라고 지었다. 누니는 마차세와 박상희 사이에서 낳은 딸로 눈이 많이 오는 날 태어났다.


    뜯긴 것

         -길녀야 길녀야, 어딨니? 길녀야‧‧‧‧‧. p.243

         서걱 잘려 나가는 파의 토막처럼 툭 끊어지는 이별은 슬픔마저 거세한다. 그렇게 사라진 부위에 관한 상실감은 기억 속에서 모순으로 피어난다. 7에서 9 사이를 오가는 숫자 8은 그 생김처럼 마치 뫼비우스의 성질로 돌변하여 극과 극점에 끊임없는 도돌이표를 찍으며 무한의 지옥도를 펼쳐 보인다. 잘린 파의 단면은 상처일까? 그곳에선 피가 났는가? 그런데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내 속 어딘가가 퀭하고 휑하다. 이것이 도무지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다. 애틋하거나 그립거나 아련한 것은 이별이라 여겨지는데 이것은 대체 어떤 감정일까? 떨어졌다기보단 찢기거나 뜯긴 것 같은데 당사자는 분명히 그 단면을 본 것 같은데 투명한 그것은 말이 없다. 분명히 나와 붙어 있었고 한 몸이라 여겼던 무엇이 순식간에 제거된 기분이 든다. 혈연이란 물줄기는 자연과 같아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독립된 몸뚱이란 개체 속에서 흘러간다. 혈관 하나 연결되지 않는 각자의 신체는 마치 줄기에서 떨어지는 꽃송이 같다. 상실은 이해되지 않는 병처럼 쌓이고 희미한 대상에 덧칠하며 경멸과 혐오와 자기 연민 사이를 거칠게 오간다. 마지막 숨까지 저주하며 메말라 성마른 불꽃이 모든 것을 연소시켜야만 끝나는 일인 것처럼.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맨눈으로 바라봤을 때, 인쇄물에서 보았던 한국의 정서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에 비친 것은 화백이 살았던 시공간의 퇴적과 침식, 풍화가 반복된 굴곡진 지형의 표면이었다. 화면 위 굴곡진 요철은 한 면으론 채울 수 없던 기록 같았다. 한겹 한겹에 담긴 사연이 여러 겹과 곁을 이루며 그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화음이 조율하는 현상은 어느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이어진 하나의 유기체가죽처럼 느껴졌다. 한 프레임에 걸리는 풍경은 사람마다 그리고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사연이다. 다만 분류된 카테고리 안에서 개인의 기록이 처리되고 있어 상식이란 기준이 그것을 아우를 뿐이다. ‘길녀는 이도순의 젖먹이 딸로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이후 이도순의 해마속에서 헤엄치던 이 소설의 최연소 인물이다. 위의 글은 이도순을 떠올리며 드는 감정과 그것에 스민 생각을 적어본 것이다. 내장의 쓴맛은 뼈의 깊은 맛과는 다르다. 처음엔 마동수의 삶과 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시대상의 흐름에 초점을 맞춰 글의 주제를 찾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세상을 산 가장 불쌍한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시누크와 린다를 낳은 여성들과 이도순은 비슷한 카테고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시누크와 린다는 그 이별을 곁에 두었지만 이도순은 이별을 억눌렀다. 해부도에선 찾을 수 없지만 분명히 속에 있던 어떤 장기가 뜯겨나간 듯한 기분을 이도순이 느낀 것은 아녔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1987104일 도봉구 어느 요양병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이도순은 사망했다. 남편이 둘, 딸이 하나, 아들이 둘,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 이렇게 자신을 통하여 8명이 가족을 이루었다. 그녀는 장수했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자맥질

          소설 공터에서를 보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연거푸 떠올랐다. 문장이 이토록 시야와 사고를 확장해 줄 수 있구나. 내가 보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될 수 있구나. 사람의 행동이 이러한 표현으로 대입하여 설명할 수 있구나. 다사다난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근현대사가 한 개인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이토록 입체감 있게 표현될 수 있구나. 이 소설을 보며 나의 개인사 속 사람들도, 비슷한 시대상을 가진 다른 이야기 속 사람들도 소설 속 프레임에만 잡히지 않을 뿐 그 세상 어느 구석에서 존재하겠다 싶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설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매 순간 벗어나고 싶다거나 잃어버린 고착된 무엇인가가 자꾸 떠오를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 대상이 정작 무엇이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분명히 있는 것 같지만 벗어나거나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것은 과연 정말 존재하는가!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이 서지 않은 채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게 되는 선택은 정의롭거나 명예롭다 평가하기 어렵다. 생존은 끝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한 무의식이 발동하며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이 나타난다. 억압된 경로에서 살기 위한 길로 내재 된 본능이 그것을 이끈다. 이도순이 흥남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처럼 마동수는 자기 삶의 마디마디에서 그 방향키를 망각했다. 아버지란 본분을 떠올려야 했다면 마동수는 그 분야에서 배운 것이 없었을 것이다. 오라는 곳으로 갔고 하라는 대로 했고 살기 위해 익숙해진 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매분 매초 오물이 생산되는 이 세상은 한편으론 하루의 빛이 연두에서 군청으로 변하고, 반짝이는 눈가루와 와글거리는 별빛으로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오늘의 내가 한 걸음 진화한 상태인지 두 걸음 퇴화한 상태인지 모르겠지만 불편한 양다리를 교차하며 앞이든 뒤든 움직여 온 상태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미지의 원점으로 복원하거나 복구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뚱이가 있으니, 시간의 선상 위에 있고 이동할 공간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삭제되거나 제거된 시공간은 텅 비워짐과 동시에 새로운 우주로 태어났을 것이다. 물속을 벗어나기 위한 자맥질은 아가미가 없는 포유류에겐 절박한 몸동작이다. 하지만 물속을 헤엄쳐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곳은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 세상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화하는 곳이고 한순간을 움켜쥐며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7에서 9로 가는 8의 여정은 지난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진동은 언젠간 끝이 난다. 매분 매초가 흐르는 세상 속을 살아가기 위해선 움켜쥔 손을 놓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허공으로 놓아주고 비어있던 곳을 새로운 공기로 채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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