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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 3기] 생존 코드명_해석(김훈 공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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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선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99회   작성일Date 25-02-12 23:12

    본문

    생존 코드명_해석

     

    이선영

     

      여기, 역사의 거대한 파도가 남긴 주름 사이에 끼어 있는 가족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남북 분단과 6.25 전쟁, 급진적 경제 개발 등 지난 100여 년간 한국 근현대사의 파도는 거칠고 강렬했다. 시대의 깊은 주름 속에 낀 마동수와 그 가족의 생을 들여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없는 생의 조건을, 어쩌면 우연이 직조한 결과뿐인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운명으로 끌어안고 생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걸까?


      “네 운명을 사랑하라.” 초인으로 거듭나라는 니체의 말이 마동수 가족의 삶 앞에서는 왠지 씁쓸하다. 생존 자체를 위협하거나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서 극복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생의 굴레가 있다. 니체 또한 토리노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을 목격하고는 그 말을 끌어안고 엉엉 울고 난 후 정신 줄을 놓지 않았던가. 발가벗은 현실을 마주하고 해석의 코드를 놓치면 아무리 뛰어난 지성도 미치는 거다. 통제할 수 없는 날것의 현실에 완패당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생은 버겁기만 하다. 한 생에서 끝나지 않고 고난이 혈연으로 이어져 날고 싶은 자식의 족쇄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 숙명의 존재인 우리는 이 어찌할 수 없는 것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 내야 할까? 이해하면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나 세계는 통제력을 주어 자기 창조로 나아가는 길을 내준다. 마동수와 이도순의 두 아들 마장세와 마차세는 해석의 코드 설정에 있어 각기 다른 방식의 경로를 드러낸다. 동일 조건 안에서 생존을 위해 각자 해석의 코드를 생성하며 거칠고 사나운 현실에서 자기 생의 경로 만들어 간다. 형은 회피와 운명의 굴레에 묶여 하류로, 동생은 극복과 자기 창조의 상류로!

     


      가족은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세계이자, 나와 남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첫 번째 공간이다.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신뢰, 사랑, 갈등 등을 경험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배우고 만들어 간다. 자기 세계 형성의 바탕인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형제의 부모는 질곡의 거친 한국 역사를 정면으로 맞았다. 동시에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할 코드 생성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며 생활의 가운데로 침투하지 못하고 겉돌거나 순응해야 했다. 아버지는 가정에 닻을 내리지 않고 홀로 떠돌며 부유했고 어머니는 첫 남편, 딸과 헤어져 홀로 피난 와 생을 견디며 살아내지만 자기 연민에 가득 차 있다. 신뢰와 사랑보다는 생존과 원망에 머문 부모의 관계와 태도는 고스란히 형제에게 가 닿는다. 그들에게 가족은 옥죄이는 혈연의 사슬로 묶인, 달아나고 싶으나 벗어날 수 없는 혈통의 늪이었다.

     

      부모라는 환경 조건은 같지만, 형제의 해석 코드는 달랐다. 해석은 어떤 대상이나 행위 등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과정으로 그 의미나 의도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고 드러내는 행위가 해석이라면 형 마장세의 해석 코드는 회피, 도피, 기피의 ‘3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다. 해석의 장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동생 마차세의 직시, 성찰, 소통 중심의 분명한 해석 코드와는 대조적이다. 형제의 해석 코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의 죽음, 결혼과 출산, 직업 등의 현실의 장에서 반복적인 상호작용을 거쳐 각자 하류와 상류를 향해 생의 무늬를 그려 나간다. 마장세는 감옥으로, 마차세는 단단히 뿌리 내린 현실로! 선택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가족, 특히 부모와의 긍정적 관계성을 상실한 형제지만 부모의 죽음을 직면하여 경험하고 관계의 의미를 묻고 답하며 마차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스스로 해석하며 자기 기원을 창조하였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자기 안에서 스스로 해석 해 보려는 시도는 회의하고 질문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마차세는 끊임없이 묻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왜 집에 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 왜 집에 오는 걸까?”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려다가 또 다른 수렁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어째서 한 평생 입 밖에 낸 적 없는 그 이름을 말년의 암흑 속에서 기억해 내는 것일까?”,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인가?”, “아가미는 지상에 쓸리면서 피를 흘렸고, 그 아가미가 날짐승과 길짐승의 허파가 되었다. ~~ 그런데, 그 물고기는 왜 뭍으로 올라온 것일까?” 해석이라는 생존의 코드는 있는 그대로 보고 스스로 묻고 답하며 작동한다. 곰곰 생각하며 그 답을 찾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석학적 순환의 반복으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여 생의 창조자로 설 자리를 조금이나마 만들며 나아간다.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는 도구며 세계는 언어로 지어진 집이다. 자기 해석의 과정에서 대화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 이해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솔직한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마차세는 생명 에너지 충만한 박상희와 대화 코드가 딱 맞는다. 물적 토대는 빈약할 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지지대가 되어 주고 생을 지탱하는 터전이 되어 준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족이 되어 아무도 닮지 않고 스스로가 기원인 여자아이를 세상에 내어 놓는다. 해석의 중요한 장치중 하나인 누군가와의 대화와 소통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결 통로를 만들어 순환과 축적의 과정을 통해 창조 에너지의 생산을 돕는다.

     

      가족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과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 특히, 부모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가족의 의미와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신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마차세는 홀로 장례식장을 지키며 자신은 몰랐던 젊은 시절의 부모와 만난다. 청춘의 아버지, 신문 부고 란에 실린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낯설다.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얻고 아버지의 과거와 연결된 낯선 이들을 마주하며 자신과 부모의 관계를 재구성 한다.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재해석 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해석을 바꿈으로써 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할 수 있다. 있었던 사실 그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해석은 바꿀 수 있다. 과거에 대한 해석이 바뀌면 현재의 는 다른 차원의 존재로 나아갈 틈을 만난다. 과거를 딛고 앞날을 열어갈 수 있는 지금의 지지대가 된다.

     


       생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을 대비해 보듯, 자신의 생을 고통과 연민이라는 감정의 웅덩이 속에서 건져 올려 이성의 해석이라는 생존 코드로 헤아려 본다. 생이 시작된 곳은 선택할 수 없지만, 생이 끝나는 자리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 선택할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생의 굴레로 힘겨웠다면 물구나무서기 하듯 자신을 뒤집어 본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스스로 해석한 세계를, 스스로 창조한 세계를, 생이라는 공터에서 활짝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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