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2기] 자유가 애민으로 승화된 여정(열하일기_연암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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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밥을 차려 먹고 출근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매일매일 산더미처럼 쌓여 개인적인 일까지 겹치는 시점에는 가슴에 바윗덩이를 얹어 놓은 듯하다. 이 와중에 글쓰기라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가끔씩...특히 이렇게 글쓰기 마감이 다가오면 ‘내가 미쳤지!!! 아이고 이렇게 팔자를 볶으며 살까?’라며 새문장2기에 합류한 자신을 원망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새문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자신을 완성해 가는 길이란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쓰던지, 쓰여지던지 간에 오늘도 묵묵히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읽기와 쓰기에 대한 갈망을 실천해 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유쾌한 연암의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도대체 중국의 고전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비유하여 기록해 놓은 것을 읽고 있자면 연암의 앎은 얼마나 넓고 깊은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앎이 생성될 수 있었던 것은 연암의 어떤 여건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열하일기에 대한 궁금증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연암의 앎에 대한 원동력은 직업(직장)에 대한 포기였다. 즉 생계에 대한 포기로 연암은 시공간에 대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은 오롯이 앎을 향해 투자되었으며 이 앎은 자신의 본성에 더욱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 자신만의 삶을 살게 하였다. 그럼 나에게 자유란 무엇일까? 연암을 통해 자유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 본다. 그동안 자유는 나에게 공기와도 같아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현재 내가 찾고자 하는 자유는 무어란 말인가? 먼저 자유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자유: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 법률의 범위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행위. 소극적으로는 외부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적극적으로 자기의 본성을 따라서 목적을 실현할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말 |
사전적 의미로 자유를 해석해보아도 나는 부(不)자유인이다. 언뜻 보기에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실상은 나보다 사유가 높은 사람들에게 늘 종속되어 있으며 육신은 생계에 부쳐 직(職)에 얽매여 있으니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을 마주할 때면 사유의 폭이 낮고 좁아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며 마치 어두운 감옥에 갇힌 기분마저 든다. 그럼 유쾌한 연암의 자유에 대해 논해 보자.
연암은 어떻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면 관직에 나아가 입신양명하는 기득권으로서의 삶은 당연하였다. 그당연함을 선택하지 않음에서 연암의 노마드적인 삶은 시작되었고 그것은 그동안의 삶을 해체하는 인식의 전환이었으며, 용기였고, 배짱이었다. 생계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시공간에 대한 자유를 확보하였고 이렇게 확보된 자유를 통하여 앎을 충분히 축적할 수 있었다. 앎의 확장은 사유의 패러다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통찰의 정점에 이르게 하였으며 딱 그즈음 연암은 운 좋게 열하를 기행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장자 소요유편에서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큰 뜻을 품고 비상하는 대붕처럼 연암이 그동안 갈고 닦는 모든 지식을 장착하여 조선의 사회구조에 대한 부조리를 개혁할 그 무엇에 대한 바램으로 선뜻 열하 기행을 나선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 아무리 위험천만한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분히 채우고 자신의 모든 감각을 깨워 신문물을 최대한 흡수하고 돌아오리라 하는 결기가 여행록 곳곳에서 느껴진다. 또한 기행 내내 스스로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자와의 끊임없는 관계맺기를 통해 차이를 긍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한다. 열하를 향한 길목 구석구석에서 작고 힘없는 나라 조선의 민초들에게 들려줄 희망을 발견하고 깨진 기와 조각과 똥 한덩어리의 쓰임에 주목하며 부국강병을 꿈꾼다. 또한 호질이나 허생전, 양반전과 같은 골계문학을 통해 위정자와 양반들을 통쾌하게 꾸짖음으로써 백성을 위로한다.
열하기행은 개인의 자유에서 시작된 앎의 축적이 거대한 통찰로 이어져 애민으로 승화하는 선각의 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개인의 욕망이 자발적으로 구현되어야 욕망과 존재는 상호 소외되지 않는다. 이래야 자신의 존재성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데 그런 상태를 나는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에서 일상의 구체적 생활이 이념의 소외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실현하는 행복한 ‘장’으로서 살아남는다. 거기서 개인의 존재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런 행복한 개인들의 이루는 공복(公福)이 바로 공복(共福)이다” -최진석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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