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가벼움과 무거움의 사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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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衝動)
순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마음속의 자극
<가벼움과 충동>
충동의 인간을 묘사할 때 우리는 "충동에 휩싸인다" 표현한다. 충동은 인간을 마치 무언가에 홀린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힘이다. 충동에 휩싸일 때, 존재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이유들로 가득 채워진다. 충동은 이성과 감성,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여 인간을 내부로부터 행동으로 몰아내는 작용이다. 행동 전의 두려움과 행동 후의 결과를 망각하게 한다. 존재를 "그래야만 한다"로 무장시킨다. 충동은 억압, 권태, 불안에서 벗어나 존재를 다른 차원으로 튀게 하는 방아쇠다. 다른 한 편, 충동은 존재의 쾌감을 위해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뒤덮게 한다. 모든 쾌감은 그만큼의 반작용을 갖는다. 쾌감에는 필연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위험이 수반된다. 쾌감은 곧 위험이다. 충동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원시적이며 폭발적인 힘이다. 지금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영원회귀의 암울함과, 그것을 벗어나 나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사건이 마주칠 때. 충동의 특이점이 발생한다. 그 순간 존재는 영원회귀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충동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다. 스스로에게 "한 번뿐인 인생"이란 암시를 통해 영원회귀는 극복된다. 충동은 곧 운명애다. 자신의 삶을 끔찍한 윤회로부터 탈출시키려는 욕망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충동에 한없이 휘둘리는 존재를 목격한다. 토마시가 섹스를 통해 끝없는 쾌감을 추구하듯. 테레자가 사랑을 찾아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듯. 사비나가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것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배반하듯. 프란츠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가정을 버리듯. 모두 자신으로 살고자 끊임없이 충동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충동의 소용돌이는 어느새 가라앉고, 그 결과와 책임을 받아 든 존재는 고통의 후폭풍에 허우적대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그런 괴로움의 탈출을 위해 또 다른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충동의 영원회귀' 이렇듯 인간은 실상의 양면을 인지하지 못한 채, 순간의 충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을 원망과 후회로 도배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거움과 충동>
어떤 존재든 문명에 편입되는 순간 억압은 필연적으로 지어진다. 억압의 주체가 되거나, 억압에 편승하거나, 억압에 스며든 존재는 무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키치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편견, 포장, 위선, 가식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키치는 무거움의 자양분이 된다. 잘 가꾸어 놓은 무거움 속에서도 존재는 근원적으로 가벼움을 욕망한다. 결국 충동은 삶의 곳곳에서 발발한다. 하지만 대부분 최종심급의 저항을 마주하고 충동에서 벗어난다. "그래야만 하는가?" 무거움은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인간은 생각의 노예다. 우리는 매 순간 인생의 전후좌우를 면밀히 살피어, 그것이 도달하는 파장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생각의 노예로 전락한 존재는 현실, 걱정, 두려움으로부터 결국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무거움에 파묻힌 인간은 충동의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무거움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는 힘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온갖 충동에 자신을 맡긴 인간들을 목격한다. 토마시의 충동은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삶을 영위한다. 테레자의 충동은 부모의 지옥으로부터 도주하여 자신을 찾는다. 사비나의 충동은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으며 자유를 구가한다. 프란츠의 충동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충동을 따르는 돌발적 결정 뒤에는 보다 심오한 무엇,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이 숨어있다. 그 무엇은 시궁창 같은 앞날이 눈에 훤해도,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계산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이다. 자신의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것만이 이성과 합리, 선과 악, 통념과 표상, 키치의 왜곡을 넘어 존재를 전에 없던 세계로 이끈다. 삶의 어느 순간,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야 한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사이>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가벼움은 일시적이며 단편적이다. 가벼움 자체가 목표로 되어버린 인간, 사비나.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배신한 존재에게 무엇이 남아있을까? 결과와 책임을 외면하는 가벼움만으로는 무엇도 이룰 수 없다. 가벼움으로 점철된 삶은 어느 순간 모래성이 되어 공허와 허무로 귀결된다. 자유가 구속에서 가치를 지니듯, 가벼움은 무거움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무거움은 항구적이며 복합적이다. 무거움은 정체다. 생명의 원리를 따르려는 본능을 잠재운다. 정체는 생성과 순환이라는 우주의 원리에 반한다. 인간의 마음만이 정체를 갈구한다. 우주의 어떤 것도 정체하거나 불변하지 않는다. 순환은 생명이며 정체는 죽음이다. 하여, 무거움은 반생명적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가벼움도 무거움도 근원적으로 존재를 구원하지 못한다. 가벼움에 휘둘리지 않으며 무거움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존재의 무게 중심이다. 가벼움에도 무거움에도 휩쓸리지 않는 무게 중심은 존재의 내적 힘에서 생성된다. 충동의 화신 토마시에게 찾아온 결정의 순간, 그는 충동의 화염에 휩싸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이 애원하는 탄원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다. 본래 그였다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동일시되는 아들의 활동을 열성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달랐다. 판단은 신중했고 결정은 단호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선택을 했다.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 테레자를 위해 거절한 것이다. 그는 혈육과 이념, 억압이라는 충동에 휩쓸리지 않았다.
자신을 세운 인간이 사회와 타인을 위한 공적 인간이 되려 할 때. 고귀한 가치와 행위를 통해 존재는 내적 힘을 가진다. 자잘하고 이기적이며 편협한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무게 중심을 갖는다. 자기 자신만이 아닌 세상을 향한 공적인 삶은, 가벼움의 중심을 잡고 무거움을 해체하는 존재로 상승한다.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에 빠지지 않으며, 그 신비롭고 미묘한 세계를 유영하는 무게 중심-내적 힘을 갖는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사이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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