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당신에게 필요한 삶의 기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_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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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필요한 삶의 기술
저기, 시소를 타며 노는 아이들이 있다. 둘 사이의 무게가 다를 때 더 재미있는 놀이. 무게 차이가 만들어주는 오르고 내리는 리듬을 온몸으로 느끼며 즐겁다. 일상의 즐거움도 차이가 만들어 내곤 한다. 하지만 그 차이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차이로 생겨난 호기심이나 궁금증의 연결 고리는 몰이해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끊어진다.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의 중압감은 일상을 놀이가 아닌 지옥으로 만들거나 생을 버텨야 할 그 무엇으로 바꾼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시소 반대편에 앉은 묵직한 저것을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운명의 수레바퀴가 짓누르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그렇다면 생의 무게와 시소 놀이를 할 수 없는 걸까? 영원회귀가 진실이라면 이 무게는 계속된다. 생의 무게로 고통스럽기만 한 지금 여기에서의 유일한 출구라 생각했던 그것이 또 다른 고통의 문을 여는 입구가 된다. 출구와 입구만 찾아 헤매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원히 지속될 묵직한 이 현재를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 시작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무게의 허상을 깨뜨려 보는 거다. 이를 가능케 하는 자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무거움과 가벼움,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삶의 기술을 연마해 ‘아모르 파티’의 정신으로 시소 놀이를 즐겨 보자.
하나. 나와 나 사이의 일체감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겹겹의 층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가 아는 나는 정말 나인가? 남이 볼 때의 나와 내가 볼 때의 나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할 것이다. 나는 크루아상처럼 여러 층위를 지닌 ‘한 덩어리의 그 무엇’이다. 그 층위를 이루는 것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이 겹겹이 쌓인 ‘그것’이다. 포개진 층으로 풍미를 더 하는 크루아상처럼 층위의 일체감은 나만의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존재로 서게 한다. 하지만 테레자는 거울을 보며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자 시도한다. 개인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육체는 버리고 싶은, 빠져나오고 싶은 대상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인생의 발목 잡은 이유 그 자체였기에 엄마 생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힘에 겹다. 집단수용소 같은 집안의 갑갑함을 견디는 유일한 위안은 책과 음악이다. 여기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다 어느 날 만난 토마시를 고통의 출구로 삼는다. 그를 신분 상승의 사다리이자 지금 세계의 탈출구로 삼았지만 그와 함께한 세계는 또 다른 진흙탕이다. 온몸에 들러붙은 진흙들, 토마시가 탐하는 여성의 육체들로 인해 삶이 다시 무거워진다. 토마시의 머리에서 풍기는 여자 성기 냄새 또한 견디기 힘든 무게다. 다시금 육체를 버리고자 하는 추락 욕구에 빠져든다. 추락 욕구는 자기 분열에서 오는 결과다. 현대의 여성들이 성형중독에 시달리고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사회가 정한 미의 잣대로 나의 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걸그룹 소녀와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오징어로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정신과 영혼은 돌보지 않고 오직 외모, 몸에만 치중하는 불균형의 상태. 그렇다면 나를 이루는 육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의 일체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이나 사회의 기준에 의한 평가가 아닌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 자체로서 스스로 존엄한 영혼을 지녔음을 믿어 보는 거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보는 거다.
두울. 나와 너 사이의 균형감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할 숙명을 지닌 우리는 우정과 사랑의 끈을 사람들과 연결하고 이으며 삶의 무늬를 짠다. 씨실과 날실이 엮이며 아름다운 무늬를 드러내듯 사랑하는 이들과 따로 또 같이 그것을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자신의 빈곳을 채울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을 찾는다. 때론 빈곳을 채우기 위해 그 사람의 무늬를 갈아 자기에게 딱 맞는 조각으로 만든다. 토마시는 이런 과정이 부담스럽다. 책임과 의무, 서로를 구속하는 당위의 관계가 무겁기만 하다. ‘황홀한 우정’이라 칭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흔들거나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가벼운 관계를 추구한다. 그러다 강물에 떠내려 온 송진이 칠해진 바구니에 담긴 아기 같은 테레자가 눈앞에 솟아났다. 그녀가 짊어진 짐이 가엾고 아프다. 그래야만 하는 운명적 끌림으로 그녀를 위해 자유, 거주지 등 많은 것을 포기한다. 여전히 여자의 몸을 탐하지만 사랑은 오직 테레자만을 향하며 그녀를 돌보고 그녀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 그렇다면 과연 테라자는 행복했을까? 둘의 관계는 서로를 보듬는 조화로운 무늬를 그리진 못했다, 서로를 채워주지 못한 일방적 사랑, 불균형한 모습이다. 그녀의 공허함을 채워준 상대는 토마시가 사준 강아지 카레닌이다. 그녀 일상의 시계태엽을 감아주는 존재! 아침에 눈을 떠 앞에 있는 하루의 시작이 즐거워 껑충껑충 뛰어다닐 수 있는 순수성이 테레자를 살게 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균형감이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탕진되지 않도록, 자신의 무게가 서로를 짓누르지 않도록 아름다운 균형을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한자 ‘사람 인(人)’ 글자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균형감 있게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엣. 안과 밖 사이의 스며듦
우리는 부모, 인종, 국적 등의 외부 환경을 선택할 기회조차 없이 어느 날 그 속에 던져진다. 생의 시작점에서 주어지는 조건들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다. 내면의 특성과 기질에 맞지 않더라도 운명으로 여기고 순응해야 한다. 하지만 사비나는 배반을 통해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운명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할 당위적인 것의 중압감에서 도망친다. 부모, 남편, 애인 그리고 조국을 배반하고 더 이상 배반할 것 없는 끝에 다다른다. 거기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자신을 짓누르는 것으로부터, 짐짝 같은 무게를 던져버리고 끝내 홀로 남는다. 그녀의 우울증은 배반할 대상이 없는 무료함. 깃털보다 가벼운 자신의 존재가 오히려 견디기 어려워졌기에 겪어야 하는 가벼움의 부작용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온전히 스미지 않고 그 색에 완전히 취하지 않고 나의 색을 지니고 세상과 조화로운 소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운명을 긍정하고 나의 내면과 외부 세계와의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 구멍으로 안과 밖이 서로 스며들며 단단한 무게중심을 갖도록 하자. 베토벤의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의 수수께끼는 각자의 그 조화를 위한 선택에 용기를 주는 응원이다.
나와 나 사이의 일체감, 나와 너 사이의 균형감 그리고 나와 세상 사이의 스며듦의 조화를 지닌 소설 속 인물은 카레닌이다. 개보다 못한 인간이라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진다. 무게를 느끼지 않는 아름다운 균형의 상태. 생의 마지막까지 이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면 존재의 의미를 정녕 다했기에 웃으며 떠날 수 있을게다. 단 한번 뿐이기에 중요치 않은 게 아니라 단 한번이기에 삶은 소중하다. 유일무이한 이 순간의 내 생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카레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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