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오늘이라는 황홀한 맹목성(노인과 바다_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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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황홀한 맹목성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 햇살이 부딪혀 반짝인다. 일렁이는 파도를 넘실거리며 한 노인이 오늘도 어김없이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산티아고는 어부로서의 자기 신뢰와 언젠가 만날 그 녀석을 기다리며 84일을 보냈다. 드디어 오늘, 엄청난 크기의 녀석과 한 줄로 연결되고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포기하고픈 유혹도 두 손을 파고드는 통증도 삼키며 끝까지 놈과 싸운다. 승리는 그의 몫. 배보다 큰 청새치를 싣고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성공의 짜릿함도 잠시, 승리의 전리품은 상어 떼의 미끼가 되어 맹렬한 공격을 받고 앙상한 뼈다귀만 남는다. 집에 돌아와 잠이 든 산티아고의 상처투성이 손을 소년이 본다. 울음이 터진다. 소년은 안다. 드넓은 바다 위, 오직 자기 양팔만으로 대결해야 했던 그의 외로운 시간과 묵직한 고통 그리고 자신을 넘어선 자가 주는 강한 울림을 말이다. 다시 잠이 든 노인은 사자 꿈을 꾼다.
사자 꿈을 꾸는 노인? 청춘도 아니고! 인생이라는 문장의 마침표를 곧 찍을 늙은 자에게는 도전과 모험, 용맹함의 상징인 사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낯설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다르다. 눈빛이 바다를 닮은, 몸은 노인이지만 정신과 영혼은 청춘의 그것을 지녔다. 펄떡이는 청춘의 심장과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노장의 지혜를 겸비한 자이다.
“두 눈을 제외하면 노인의 것은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p10)
산티아고는 어부로서의 운명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출렁이는 바다, 숙명의 삶터로 매일 매일 나아간다. 더 먼 바다로 갈 용기가 있고 물고기를 잡지 못한 긴 시간을 허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과정일 뿐이다. 그가 지닌 푸른 바다 눈빛의 비밀은 매일의 일상을, 그러니까 ‘오늘’을 성심껏 사는 데 있다. 오늘을 성심껏 사는 그의 황홀한 맹목성은 빛의 에너지를 만들고 출렁이는 푸른 바다를 닮은 눈빛을 지니게 한다. 바다를 품은 눈빛을 지닌 사람은 일상이라는 사냥터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내 안에 존재의 강인한 뿌리를 내린다. 매일 나아가 바라본 바다가 그의 눈 속에 담기고 결국, 바다 그 자체가 된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은 오늘을 사는 인간은 고통에 맞서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이 패배할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다. 고정된 과거에 묶이지 않고 희미한 내일의 막연한 환상을 품지 않는다. 내 눈앞에 펼쳐진 오늘의 순간들을 성심껏 산다. 오직 자기로 존재하는 사자의 품격을 지닌 노인의 비밀은 바로 오늘을 사는 힘에 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평생 그래왔듯이 더 먼 바다로 나가 출렁이는 파도를 느끼며 그물을 내리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어부의 소명으로 오늘을 성심껏 살 것이다.
“싫은 것으로 말하자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보다 더한 게 있을까”(p39)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 속에는 수많은 걸림돌과 유혹, 하지 않을 이유와 포기하고픈 순간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깔려있다. 더 자고 싶은 유혹, 고통을 피하고픈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산티아고는 매일을 그렇게 살았을까? 매일을 성심껏 사는 자가 이뤄내는 성취는 무엇보다 생의 만족감, 살이 있다는 생생한 느낌 그 자체일 것이다. 살아갈 힘은 결국 오늘이 바로 내가 살아갈 유일한 순간이며 여기가 바로 내가 있어야할 곳이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그 확신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곧 내가 태어난 이유이며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니는 활기이다. 충만한 기쁨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니 지치지 않고 신나게 할 수 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지금, 여기에서 꾸준히 행동하는 자는 성취의 짜릿함을 언젠가 반드시 맛본다. 그것이 사는 맛이다. 쫄깃한 그 맛을 보면 도처에 널린 하지 않을 또는 포기할 이유들이 약해지거나 사라진다. 그 맛을 보기위해 때론 인내심을 가지고 일상을 견디고 버틸 수 있다. 실은 성취나 성공은 결과의 맛이 아닌 그 과정으로 가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의 몫이다. 산티아고는 큰 물고기를 잡겠다고 장담하거나 잡지 못할 결과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이라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과는 자신의 힘만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일에 몰두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또 한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p34)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빈틈없이 해 내고 싶은 욕망을 품었기에 늙지 않는다. 청춘의 시간은 신체로 결정되지 않고 마음의 의지, 욕망의 출렁임으로 정해진다. 안정감으로 고정된 현실에서 고집쟁이 노인으로 살지 않기에 소년 ‘마놀라’와도 깊은 우정을 나눈다. 청춘 노인인 산티아고의 삶은 오늘을 성심껏 사는 황홀한 맹목성이 빚어낸 아름다운 형상이며 빛나는 순간인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낸 사람이 지닌 비밀을 품은 이야기이다.
펄떡이는 생의 순간순간의 생생한 맛을 경험하는 일. 사는 맛을 느끼며 매일의 일상이라는 바다위에서 기다리는 물고기와 대결하는 한판 승부를 걸어볼 용기가 있는가? 앞에 놓인 오늘을 성심껏 살아갈 힘과 하고 싶은 일,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가? 산티아고의 생에서 엿본 사자 꿈의 비밀을 어떻게 풀어내고 삶속에 녹여 낼지는 오직 자신의 몫이다. 그저 한 번의 찌릿한 감정으로 와 닿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면 읽고 쓰는 일을 왜 하는가? 읽고 쓰는 이 순간의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인내심이 쌓여 오늘을 성심껏 사는 동력으로 바뀔 것이라 믿는다. 산티아고가 보여준 것처럼 매일 일찍 일어나는 힘겨움을 넘고 미끼를 잡고 그물을 손보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바지런한 몸놀림, 운과 실력 그리고 운명을 긍정하는 맘 놀림으로 그 날을 기다린다. 언젠가 한판 승부를 펼칠 그 녀석과의 정면 대결을 말이다. 그리고는 사자 꿈을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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