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상처가 출발시킨 운명_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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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모든 인간은 의도됐든 아니든 상처를 받게 된다. 상처 입어 오목해진 우리에게는 결핍이 있다. 그곳에서 욕망이 피어난다. 상처보다 더 큰, 상처 너머의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다.
지하인은 어쩐지 상처와 자기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사이만을 도돌이표처럼 오간다. 상처에서 고개들 수 없다. 그는 악인도 선인도, 비열한 인간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곤충도 될 수 없는 것이 괴롭다. 수치스럽다. 옳고 그른, 좋고 나쁜, 악하고 선한 어떤 상자에도 맞지 않는다. 어느 가치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관념의 틀에도 담기지 못하는 자신은 세상의 실패다. 관념이란 만들어진 허상에 종일 부대낀다. 모멸감, 죄책감, 열등감, 슬픔, 분노, 피해의식… 돌림노래를 부르는 동안 감정은 증폭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이 노래가 끝나야 한다. 정적이 필요하다. 흙탕물이 가라앉아야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있다. 지하인은 차라리 모르고 싶다. 무엇이 발견되든 그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들은 혼내주고 싶다. 그렇게라도 모멸감, 죄책감, 열등감, 슬픔, 분노, 피해의식을 위로받아야만 한다. 도돌이표다. 그의 정신승리, 자기 증명 방법이다.
악인, 선인, 비열한 인간, 정직한 인간, 영웅, 곤충 중 어떤 것도 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는 그 모두이지는 않을까? 하나만은 될 수 없으나 그 합은 가능한 것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둑들이 무너지면서 경계가 열린다. 상처 넘어 바깥으로 나가보고, 고개 들어 건너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수월하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기도 한 자신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념이 있고 그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본질주의는 자신마저도 지하실에 가둔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니 점점 썩고 변형되어간다. 상자에 들어맞지 않는 상호 모순 덩어리 자신을 칼 같은 신념으로 처단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서 사소한 것도 흘려버릴 수가 없다. 오목하게 고인 물에서 악취가 난다.
지하인은 무엇을 따를 수도 없고 무엇을 만들 수도 없었다. 상처는 숨겨지지 않고 더욱 깊게 파였다. 행동하려 하면 쪼그라들었고 다시금 도돌이표 안에 갇혔다. 인간은 공식으로만은 채워지지 않고 욕망만으로는 길을 잃는다. 오목한 상처를 채우는 욕망과 이성의 적절한 배합으로 사람은 각자를 넘치게 채워낼 포뮬라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욕망과 이성을 몇 발자국씩 섞어서 직조해낸 자신의 궤적이 만들어지는 거다. 궤적은 그 사람 특유의 결을 만들고 그의 세상을 짓는다. 미혼모 아이로 태어나 가난한 노동자의 집안에 입양되었던 스티브 잡스, 성폭행, 낙태, 알코올 중독의 트레이시 에민 같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확실히, 자기인 그들의 세상을 결국 지어냈다. 가끔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무너지기도 했겠지만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실험을 거쳤기 때문에 고유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 다다른 이들에게는 상처보다 빛나는 열매가 열린다. 상처투성이 작은 인간들이 상처를 뛰어넘는 큰 존재가 된다.
나의 흠을 사랑하라. 그것이 나의 결을 만든다.
나의 상처를 사랑하라. 그곳에서 나의 열매가 맺힌다.
나의 오목한 상처가 출발시킨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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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님의 댓글
김민석 작성일 Date도스토예프스키의 심연 속에서 고생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