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석>『달의 기식자』, <달의 기식자>, 김연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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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기식자寄食者
김연아
왕은 백마의 울음소리를 먹고 살았다
백마는 백조를 보면 울었다
어느날 백조가 죄다 사라져버리자
백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왕은 갑자기 늙어버렸다
"달이여 영원한 시간을 아는 달이여"
누가 백조를 불러와 말을 울게 할 것인가?
우리는 달의 기식자
하루에 밤을 먹어치우고
시간의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려 한다
그것은 유랑의 낱말
길 밖으로 벗어나
우연에 맡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끼의 목소리, 새의 모음 같은 것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음미하고
창궐하는 것
어둠의 빈 웅덩이, 달에서 오는 파동이
나에게 도달한다
백조처럼 길게 휘어진 목을 가지고
흰 종이에 씨를 뿌리기 위해
나는 행을 배열한다
내가 달에 기식하는 동안
달은 내 심장을 먹고 춤을 추었다
평생 마신 숨을 다 센 것처럼
나는 엄청난 피로를 느꼈다
내 이름을 갖지 못한 울음은
내려앉을 둥지가 없는 백조와 같다
그것은 나와 허공 사이에서 무한하게 펼쳐진 채
바람을 삼키고 있다
『달의 기식자』, <달의 기식자>, 김연아, 문학동네
백조가 사라지자 백마는 울지 않고, 백마가 울지 않자 왕은 늙게 되었다. 이 세 존재를 수수께끼로 남겨 논다. 그리고 다음 행에서 이 상황에 대해 아는 존재에게 물음을 던진다.
"달이여 영원한 시간을 아는 달이여"
'누가 백조를 불러와 말을 울게 할 것인가?'
달에게 질문하는 이유는 달이 영원한 시간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질문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존재의 '寄食者'이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는 기식의 형태는 잠을 자는 것일 듯하다. 잠을 통해 '하루에 밤을 먹어 치우고' 잠을 자는 밤의 시간에 존재하는 시간의 벌집 즉, 달을 통해 몸을 회복한다.
이 행위를 '꿀을 채취하려 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유랑의 낱말' 즉, 유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꿈을 꾸는 것을 '유랑'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유랑은 무엇인가? '길 밖으로 벗어나 우연에 맡기며 노래를 부르는 것' 이다.
우연 속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많은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끼의 목소리', '새의 모음'과 같은 것을 말이다. 이것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음미한다!, 나를 침범해 창궐한다!'
갑자기, 지금까지 '우리'를 말하다가 '나'를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갑자기 '백조'가 된다. '나'는 작가인 것 같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식은, 다른 말로 유랑, 꿀을 채취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작가 자신에게는 '어둠의 빈 웅덩이인 달에서 오는 파동'을 통해 '백조가 되어 흰종이 위에 자신의 글을 배열하는 것'으로 바뀐다.
작가의 영감은 특별한 형태의 달의 기식일까?
이 과정은 매우 힘든 일이다. 글을 창조해 나가는 것, 흔히 이것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비유된다. ‘달이 자신의 심장을 먹고 춤을 추었다.’ 평생 마신 숨을 다 센 것처럼 나는 엄청난 피로를 느꼈다.'
작가의 달의 기식은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는 것이다!
다시 왕과 백마와 백조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내 이름을 갖지 못한 울음은
내려앉을 둥지가 없는 백조와 같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백조가 없어지자 말은 울지 않고 말이 울지 않자 백마의 울음소리를 먹고 산 왕은 늙어서 죽음에 가까워졌다.
작품에서 '울음'은 백마에게 그 역할이 있다. 어쩌면, 첫 행에서의 ‘어느 날 백조가 죄다 사라져버리자’의 원인이 어느 날 백마의 '이름을 갖지 못한 울음' 때문이 아닐까?
백마가 사라진다면, 작가의 달의 기식 또한 사라지고 더 이상 '종이 위에 씨를 뿌리지' 못한다.
작가는 이것을 '나와 허공 사이에서 무한하게 펼쳐진 채 바람을 삼키고 있다.' 라고 표현하면서 무한함에서 어떠한 존재도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한 울음을 작가는 달의 기식을 통해 꿀을 채취하는 것 즉, 글을 써내려가는 것의 원동력이 사라져 무한한 허공 속에 방황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 방황은 왕의 늙음이요. 왕은 정신과 육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말의 울음소리, 다시 말해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는 울음소리로 젊음을 유지한다.
그냥 울음소리가 아닌 '이름을 갖는 울음소리'가 정신의 젊음을 유지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름'이 갖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인간의 눈에 포착되어 있는 모든 존재자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름이 있어야 우리 머리속에서 그것의 존재의 형태와 의미가 포착된다.
이름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름은 만물의 어머니다. (《道德經》,有名,萬物之母, 老子)
하지만 여기서 쓰이는 만물의 어머니라는 말은 함부로 쓰여서는 안된다. 이름이라고 해서 시인이 부여하는 존재의 이름과 일상생활에서의 상투적인 이름은 다른 것이다.
대다수의 '우리'가 공유하는 이름은 이미 누군가에게서 들어본 것이며 그 누군가도 그것을 또 다시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왜곡과 변질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적 표현으로 잡답과 애매성과 호기심으로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은 하이데거적 표현으로 존재 스스로가 알려주는 목소리를 듣는 자이다. 그래서 항상 새롭다. 애매성으로 잡담으로 호기심으로 오염되어 있지 않다.
시인의 글은 항상 낯설으며 어쩌면, 다음 세상을 위한 창조적 글이다. 다시 말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최진석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름을 이런 의미로 생각하고 본다면, 이름을 갖는 울음은 백조가 내려앉을 둥지를 제공하고 결국 왕을 늙지 않게 해준다.
나아가 왕을 늙지 않게 해주는 것은 울음이다. 왜 하필 울음일까? 이 울음은 둥지에 앉은 백조를 보면 나오는 것이다.
자연적 존재인 백조는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는 울음 속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것을 보면서 놀라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아닌 ‘울음’ 에서만 백조는 자리를 잡는 것이다.
악어의 눈물로는 백조를 앉힐 수 없다. 진정한 눈물로만, 시인이 백조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로만 백조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일까?
작가는 달의 파동이 자신에게 도달해 백조처럼 길게 휘어진 목을 가지고 자신의 글을 써내려간다고 한다. 달에 기식하는 우리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인.
그렇다면, 태양은? 이라는 물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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