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우리가 조르바를 품어야 하는 이유 (그리스인 조르바_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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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조르바를 품어야 하는 이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기본학교 2기 신동찬
관찰하는 자와 참여하는 자
소설 속 ‘나’(화자)와 조르바는 서로 정반대의 인물이다. 먼저 화자는 관찰하는 자로서, 행동하기 이전에 멈춰서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는 많은 지식을 쌓았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진지하고 심각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현실에 맞닥뜨리면 그의 꿈과 이상은 유치하고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결국 그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도 행동하지 못하는 그를 책벌레라고 부르며, 그를 남겨둔 채 자신의 소명과 의미를 찾아 삶의 현장으로 떠나버린다.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오던 인생이 그 말로 집약되어 버린 데 몹시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부유하며 살아온 자신을 책망하며, 동시에 현실에 뛰어들어 가슴이 뛰는 진짜 인생이 시작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시작에서 야수 같은 사내,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는 행동(참여)하는 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것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온 몸으로 풍덩 뛰어들어 온통 먹고, 마시고, 만지고, 느끼는 것이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는 머릿속에 든 게 없고, 배운 것도 없지만 그래서 자유롭다. 세상의 어떠한 기준과 이상도 그를 침범하지 못하고, 어떤 강력한 주인도 그를 노예로 만들지 못한다. 조르바는 오직 조르바가 시키는 일을 행한다. 보편적 기준과 이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짐승이나 혹은 악마로 보이겠지만, 그는 그 좁은 인식의 울타리 너머 전부의 세상을 살고 있다. 자기 자신과 세계가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그는 진정 자유롭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조르바는 완전한가?
분명 조르바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론 늙고 가진 것 없는 늙은이임에도 분명하다. 아마도 더 나이가 들었을 때, 통합된 노년을 보내기보다는 비참한 말년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화자 역시 그보다는 좀 더 현명한 노년을 보내겠지만, 생각 속에 너무 많은 세월을 뺏겨 인생의 충만함과 달콤한 열매를 충분히 맛보지 못한 채, 지나버린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보낼 지도 모른다. 조르바는 완전하지 않다. 그렇담, 화자가 조르바를 통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관념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그 대립면에서
화자와 조르바, 각각을 하나의 세계이자 자아로 바라본다면, ‘나’(화자)는 인간의 이성적, 철학적 사유로 인식하고 포착해낸 관념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인간의 인식체계,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격동하는 현실의 세계를 대표한다. 관념의 세계에서만 길러 낸 ‘나’가 현실에 부딪쳤을 때, 그 높고 고귀했던 나의 말과 생각은 매우 서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상물정 모르는 ‘책벌레’라느니, ‘대가리가 아직 덜 여물었다’와 같은 조롱 섞인 농담을 받기도 한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잠을 청하려고 애쓰며 생각했다.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내 오관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그러자면 달음박질을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배를 젓는 것, 차를 모는 것, 사격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나는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에게서 풀려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화자와 조르바라는 정반대의 두 세계가 만나 부딪쳤을 때, 그 충돌로 인해 화자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두 세계가 충돌하는 그 대립면에서 불꽃이 튀기듯 드러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진짜로 가꾸고 키워야 할 ‘진정한 나’는 관념의 세계도 아니고, 현실의 세계도 아닌 바로 그 둘의 치열한 대립면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관념의 세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끊임없이 현실에 부딪쳐, 그 경계에서 솟아나는 무엇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조르바를 품어야 하는 이유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인간은 대개 사회의 테두리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기준이나 이념, 이론의 지배를 피하기 어렵다. 아무리 주인 집 마당이 크고 넓다고 해도,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갇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주인이 자비롭고 아량이 넓어, 어떤 갈등도 없고 평화로운 상태라 해도 그것이 곧 자유는 아니다. 자유롭고 싶다면, 익숙하고 안락한 품에서 벗어나 갈등과 마찰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관념의 지배를 받는 우리가 그와 정반대인 조르바를 품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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