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동안의 고독'을 읽고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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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설
“아주 목화솜처럼 하얀 토끼가 내 품으로 담쏙 뛰어 들어왔단다.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한지......지나고 보니 그게 너를 가진 태몽이더구나” 친정엄마가 나를 가지시고 꾸신 태몽이다. 엄마에 의하면 나는 출산계획에 없던 아이였다. 딸을 내리 넷을 낳고 어렵게 아들을 얻으니 ‘드디어 대(代)는 이었구나’ 생각하고 자식은 그만 낳아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들 하나는 위험하니(할머니는 아들 둘을 낳았으나 큰아들을 첫돌에 잃으셨다) 둘은 있어야 한다고 엄마를 끝까지 설득하여 아들 둘을 보게 하셨는데 이유가 있었다. 우리 고장의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니 삼신할머니가 점지한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손자는 두 명이라는 점꽤가 나왔더란다. 예언은 적중했다. 비록 엄마의 출산계획에 ‘나’는 없었지만 우주의 창조에서부터 나의 존재는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할머니 조카 중 장님 한 분이 계셨다. 일 년에 두 번 방학 때면 어김없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는데 이야기를 꽤 잘하셨다. 동생과 나는 이 분이 오시면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조르는 통에 몇 날 며칠을 이야기에 빠져 지냈다. 처음에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가 바닥이 나면 몇 번이고 반복하여 들려주셨으며 그러다가 반복된 이야기도 지루해지면 그때부터 감춰 놓았던 장님 아저씨의 무한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창작해낸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얼토당토않은 허무맹랑한 스토리에 때론 기쁨과 슬픔, 공포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을 헤맨 적이 수도 없었다. 가끔씩 나의 상상력이 남다르다 생각될 때 이분의 수고가 일조했구나 생각하곤 한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며 어렴풋이 유년 시절, 내가 최초로 마주했던 스토리텔링이 떠올랐다. 사실과 허구가 교묘히 교차 되는 부엔디야 가문의 이야기 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천지분간을 못하게 하는 작가의 탁월한 묘사는 허무맹랑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네’ 하는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으며 등장인물들에 대한 입체적 비유는 나의 언어적 유희를 충분히 자극해 주었다.
가족이라는 굴레에 갇혀버린 부엔디아 家 사람들-‘가족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마콘도에서의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의 몽환 같은 이야기는 100년 동안의 삶을 통해 조명된다. 7대에 걸친 22명의 자손들은(아니 그 이상이 되었을 수도 있을) 이름에서부터 주체적 자아가 없다. 선대와 같은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삶의 전개도 비슷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 팔자가 꼬여 버린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의 잘못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결혼은 부엔디아 가문을 대대로 근친상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였다. 호세 아르카디오와 필라르 그리고 아우렐리아도 대령의 관계, 아마란타와 레베카의 악연, 다시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에 이르러 부모의 욕심으로 레메와 호세 아르카디오의 파멸은 이모와 조카의 근친상간의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이렇게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식욕과 성욕,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의 끊임없는 반복은 도덕적 타락으로 귀결되어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작가는 가족공동체 내에서 저질러지는 폭력과 그들 안에서 벌어지는 욕망을 위한 도덕적 타락을 통해 ‘끼리끼리’에 대한 경계에 대해 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라는 주체가 될 수 없는 ‘부엔디아 집안’의 일인으로 살아가는 타자로서가 아닌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갔다면 적어도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의 출생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제기해본다.
더 나아가 작가는 바나나 회사를 통해 지역, 사회, 국가 등 거대권력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조롱하고 은폐시키는지 거대 공동체의 부조리에 대해 한 번 더 꼬집음으로써 집단체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돼지꼬리 달린 아이의 의미
부엔디아 가문의 돼지꼬리 달린 아이란 현재 인류에서 어떤 의미로 비유될 수 있을까? 이 가문의 근친상간으로 인한 파멸에 대한 예언은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인류가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과의 연대를 통한 공존을 부정하는 이기주의에 대한 경고라 생각한다. 환경보존이니 동물보호니 하며 허울 좋게 인간종 이외의 것들과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이 일치 되지 않는다. 현재의 세계는 모든 생명체가 오직 인류를 중심으로 재배치 되고 있으며 지구가 생성된 이후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시대로 정점을 찍고 있다.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에서 보았듯이 인류 또한 흥망성쇠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유전자 변이, 광우병이나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 무자비한 탄소배출에 의한 기후 위기, 핵 개발로 인한 국가 간 위화감 조성 등 인간들끼리 반목과 연대를 통해 끊임없이 지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단초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지구를 마콘도로 비유해 보면 순리에 대한 역행의 대가를 앞으로 우리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마콘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이제는 우주에서 지구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날을 예측하는 일만 남은 것은 아닌지 불안할 따름이다.
내가 고독을 견디는 방법
부엔디아 가(家) 사람들은 100년간의 고독으로 멸문했다. 각자 고독을 견디는 방법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연금술에 빠지고 끊임없이 황금물고기를 만들기도 하며 흙과 석회를 파먹으며 고독을 견딘다. 또한 혁명군이 되어 수도 없이 전쟁을 치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려 한다. 한 땀 한 땀 자신의 수의(壽衣)를 지으며 참회하기도 하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고독을 견뎌내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한 삶은 부엔디아 가(家)의 100년 동안 견딘 고독을 결국 고립으로 귀결시켜 영원히 사라지게 했다.
누구나 고독의 시간은 부여된다. 나는 고독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이 책을 통해 나의 고독에 대해 재정의 해보았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날의 고독은 대부분 불안감을 주었으나 요즘 마주하는 고독은 이따금씩 감미롭다. 지적 호기심의 발동과 새로운 지식의 탐구를 위해 독서를 하거나 격렬한 뭔가에 몰입(등산이나 농사일 같은 육체적 노동)하며 고독을 견디는데 이런 것들은 자신을 향해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사고를 유연하게 하는 등 시시각각 성찰을 통해 성장하게 한다. 또한 가끔씩 내가 속해 있는 크고 작은 사회적 모임이나 사람들과의 유대를 통해 그간 견뎌온 고독의 산물을 방출하며 점검해 보기도 한다.
이렇게 고독은 나에게 자신을 향해 걸을 수 있게 하고 주체로서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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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동안의 고독을 읽고- 배민정.pdf (80.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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