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지식과 지혜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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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지혜
정재윤
"자신이 기본학교 들어오기 전과 그 후가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모여 한바탕 사기극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기본학교 2기 수업 중 스승의 말씀이다
우리는 6개월의 기본학교 과정 내내 기본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기본의 중요성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의 덕목을 철저히 다지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다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간과하고 있었던 삶의 빈틈이다
기본학교 졸업 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글쓰기 모임의 시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기본학교의 연장선인 글쓰기 모임에서, 우리는 스승의 가르침을 철저히 배신한다
글 마감일은 거의 지켜지지 않으며
심지어 별 이유 없이 글쓰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모두가 기본 중의 기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모임에 임했다
우리는 기본학교 내내 기본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 우리는 수개월 동안 고매한 철학을 배운답시고 분주했지만
그 후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존재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국 한바탕 사기극을 펼친 것이다
"지식은 전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할 수 없다네. 지혜란 찾아낼 수 있고 체험할 수도 있고, 그것을 따를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
그러나 말로 표현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네."
지식은 구하여 인식하는 것이며
지혜는 인식을 구현하여 얻는 것이다
지식의 습득은 자아의 확장이다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 지식은 세상의 단면만을 주시하는 유용한 무지다
유용한 무지가 증가할수록 우리는 온갖 분별심으로 세상과 인간을 나눈다
분별심은 지혜의 실제성 앞에 그 무지를 드러내며, 지혜의 구현은 지식을 정제한다
지식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발산이다
지혜는 현실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내며 또한 한계를 체감하고
그 과정을 통해 선(善)을 발견하는 수렴이다
지식의 발산이 지혜의 수렴으로 귀결될 때, 비로소 인간은 성숙하고 도약한다
지식은 '약속'이라는 기본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정신작용이다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는 지식은 내가 아니다
지혜는 온갖 모순의 현실에서
'약속'을 지키려는 정신과 육체의 몸부림 속에 얻어지는 그 무엇이다
지혜는 현실에서 구현되어야만 얻을 수 있기에 내가 된다
지식은 모두가 습득하는 '동일성'이며, 지혜는 나만이 습득하는 '차이'다
지식의 동일성 속에만 머문다면, 다른 존재와 어떠한 차이도 만들어 낼 수 없다
지혜는 사건의 한가운데 자신을 던지고
시간과 역량을 쏟을 때 얻어지는 나만의 고유한 에센스다
싯다르타도 그러하다 주어진 길을 따르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감으로써 완성에 이르렀다
"고빈다는 불안과 동경에 찬 시선으로 친구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빈다의 눈빛에는 고뇌와 영원한 추구,
그럼에도 영영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이 서려 있었다."
지식을 동일성에 머물게 한다면
우리는 평생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언어와 사유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고빈다와 같이 다른 존재가 완성한 진리를 품고 평생을 갈고닦지만 정작 자신은 텅 빈 채,
고타마의 후광에 심취해 그의 빛이 자신의 빛이라는 착각에 빠질 뿐이다
자신이 아닌 것, 누군가의 이상을 끊임없이 쫓는 자는
두려움과 갈증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신이 될 수 없다
글을 써내기 위해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습관을 고치고, 인식의 범위를 넓히고
이런 과정을 약속한 기일 안에 해내며
자신과의 투쟁을 부단히 이어나갈 때
오직 나의 글쓰기, 나의 지혜가 피어난다
공동의 약속을 어겨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한 채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 대한 긍지, 자부심이 결여된 채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글의 내용, 형식 그리고 쓰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정신, 마음, 행위 - 이 모든 것이 글쓰기다
새문장 이후 자신의 언어와 사유가 바뀌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자신을 작은 인간으로 머물게 하는 사소한 습관 하나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글쓰기란 명목 아래 한바탕 사기극을 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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