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1기/완결] 나의 언어 연대기(2) (말 - 장폴 사르트르)
페이지 정보
본문
언어-3. 성공
지나간 사랑을 잊는 최선의 방법,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13년을 함께한 짝이 없으니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짧은 솔로기간을 끝내고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한다. 그녀도 동갑내기였다. 자연스레 지난 이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혼기가 찬 그녀 또한 내게서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떠날 것이기에. 또다시 사랑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성공해야 했다. 나를 증명해야 했다. 직장은 다니기 싫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조직 생활을 할만한 성격도 아니다. 초라한 현실과 거대한 욕망을 메울 방법은 한 가지. 사업을 계획했다. 각종 성공학으로 정신을 무장했다. 공책 한쪽을 가득 채우는 버킷리스트를 1년 동안 매일 적으며 성공의 주문을 걸었다. 나의 언어를 돈-성공으로 가득 채웠다.
자본, 기술,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다. 여자친구와 합심해 돈을 모아 같이 뛰어들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반짝한 아이디어처럼 사업은 반짝 성공으로 끝났다. 무엇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패기와 열정만으론 어림없었다. 한계는 금방 도래했다. 2년 만에 사업을 접고 빚을 짊어졌다. 실패의 좌절을 추스를 겨를 없이 생계에 뛰어들었다. 삶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전환됐다.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됐다. 나를 허락하는 곳을 찾아 전전했다. 영혼 없이 3년여간 몇 군데의 직장을 옮겨 다녔다. 한 직장을 1년 이상 다니지 못했다. 우리에 갇힌 들개는 침울했다. 그즈음 두 번째 사랑에도 균열이 시작됐다. 실패에 움추러든 남자를 보며 마음이 변하는 건 당연할 터. 또다시 고통스럽게 사랑을 떠나보낸다. 사업의 실패. 사랑의 실패. 나는 인생이 실패한 듯 어쩔 줄 몰랐다.
그러던 중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어머니께서 장사를 제안했다. 자신 있었다.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족발집을 차렸다. 가게는 빨리 자리 잡았다. 하지만 새 출발의 열정이 사그라들고,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점점 무기력하게 했다. 돈을 번다는 건, 내겐 생계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채울 수 없는 공허와 갈증은 증폭됐다. 결과적으로 장사는 내가 해서는 안될 불구덩이로 뛰어든 꼴이었다. 밤장사로 누적된 스트레스와 체력고갈로 결국 병이 났다. 얼굴 반쪽이 마비됐다. 극심한 신경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멈추라는 비루한 몸뚱이의 외침에 순응해야 했다. 치료와 요양에 들어갔다. 장사를 접고 나는 또다시 심연을 향했다.
해내고 말 거란 암시를 걸고 가열하게 내달린 그것은 지옥행 열차였다. 돈-성공은 나의 언어가 아니었다. 삶의 어디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없었다. 욕망이 언어를 형성하듯 그릇된 욕망은 그릇된 언어로 나를 파괴했다. 맞지 않는 언어로 나를 채워가며 몸과 영혼은 피폐해졌다. 현실의 괴로움을 보상받기 위해 쾌락을 갈구했고, 책과 교양은 사치였다. 삶에서 철학적 가능성은 완전히 사장(死藏)됐다.
언어-4. 철학
호기로운 도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몸까지 망가져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존재는 정처 없이 표류했다. 스스로를 보듬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건, 책 속에서 길을 구하는 것뿐. 수개월을 고독에 침잠했다. 그러던 중 어느 철학자의 강론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은 그때까지 구축된 내 의식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개벽이었다. 이른바 불가에서 일컫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부모가 만든 황량한 조건 속에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삶. 이것이 깨닫기 전 나의 세계다.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루저였다. 어디서든 순응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삶이 최선이었다. 이러한 삶은 결국 기존 세계가 만든 프레임에 철저히 소모품과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것. 그렇게 살 수 없었다. 내 안에 무언가 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떨쳐내고,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포효하라 속삭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나의 태생적 조건을 온전히 긍정하게 됐다. 그전에도 부모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하지만 사회 통념과 가족에 대한 표상으로, 정상적인 환경에서 크지 못했다는 자의식을 가졌다. 진중한 성격도 어렵게 자라온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만약 아버지와 살았다면 정신적 고통과 분노로 성격장애, 인격파탄자가 됐을 터. 억압 없는 온화한 외할머니 품은, 강한 성정에도 부드러운 성품으로 나를 만들었다. 과거를 긍정하니, 현재를 긍정하게 됐다. 미래 또한 긍정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 긍정의 미래를 만들 것인가!
공부하고 사유하고 쓰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 후 동서양 철학을 망라, 환기되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 그밖에 불교, 동의보감, 명리학을 섭렵하며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혔다. 무엇보다 주요한 건 글쓰기다. 정밀한 사유로 글을 써나갈 때 나를 한계로 밀어붙인다. 철학적 사유를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지력은 강해진다. 인간은 몰입할 때 자기 자신이 된다. 이때 가치 있는 몰입은 생산과 창조의 몰입이다. 글쓰기 만이 나를 몰입과 창의로 이끈다. 백과사전만 읽고, 사회 과목만 공부하며, 인문사회 서적만을 탐독했다. 절망의 심연에서 몸부림칠 때, 철학에서 길을 찾았다. 누구도 이러한 삶을 강요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세계의 실상을 탐구하여 삶의 양식으로 삼고자 함은 나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 즉 '철학적 가능성'은 비로소 때를 만났다. 철학을 통한 인간으로의 완성. 철학은 나의 소명이자 나의 언어다.
언어-5. 새문장
공부는 함께해야 한다. 혼자서는 어긋난 관성을 따라 안드로메다를 향하거나 독선에 빠진다. 초심자에겐 나침반이 되어줄 스승과 사우(師友)가 필요하다. 철학을 마음먹고 여러 스승을 찾아 깨달음을 구했다. 10여 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 주경야독하며 현인들의 지혜를 내재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안에 스승을 모시지 않는다. 철학을 구하는 인간에서, 철학하는 인간으로 상승해야 하기에.
경험 많은 삶은 굴곡지다. 굴곡진 삶은 불안정으로 지성을 밝히기 어렵다. 반면 안정으로 철학적 지식만을 추구한 삶은, 카오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나는 이러한 보편적 한계를 아우른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겪어낸 실존을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것. 내 삶이 축복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형성된 업식(業識)을 깨달음으로 극복하는 과정.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철학적 비전. 나의 사유는 길을 잃거나, 고뇌에 빠진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모든 잡념이 소거된 내게 이르는 상태, 몰입. 나는 오직 글로서 몰입한다. 글로서 내가 된다. 글로서 새문장을 생성한다. 새문장이란, 기성 문법을 재창조한 나의 언어 나의 철학이다. 존재와 삶의 이치에 통달하려는 부단한 담금질을 세상에 펼친다. 고통과 번뇌로의 해방. 잠재력과 가능성의 발현. 존재를 꽃피우는 나의 언어는, 철학을 향해 끝없이 건너간다.
관련링크
- 이전글[새문장1기/완결] 나의 언어 연대기(1) (말 - 장폴 사르트르) 23.06.19
- 다음글[새문장] 내 마음의 우편배달부_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 23.05.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