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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 우리는 어떻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싯다르타/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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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준희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622회   작성일Date 22-11-24 10:29

    본문

    우리는 어떻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기본학교 2기 박준희

     

    우리는 누구나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또 미래에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위안을 건네고, 다시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부단히 글을 읽고, 글을 쓴다. 나의 삶이 내가 쓴 글처럼 펼쳐지길 바라며. 주말마다 신께 찾아가 기도를 드린다. 내 과오를 내 입으로 내뱉으면 그 정직함에 죄를 조금이라도 사하여 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모든 존재는 각자의 방식대로 더 나은 자신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을 그려내기 위해 독서, 글쓰기, 기도, 명상 등을 동원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꿈꾸는 이상(理想)으로 나를 데려다 줄 동아줄이 된다. 그렇기에 줄 꼭 쥔 두 손을 절대 놓을 수 없다. 열심히 올라온 만큼, 굴러 떨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악착스러워지기 까지 한다. 사지를 이용해 온 몸으로 매달리니 멀리서 보면 그가 동아줄인지 동아줄이 그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줄이 썩은 동아줄인 경우를 도처에서 목격한다.

     

    썩은 동아줄이란 이런 것들이다. 활자에 기대느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독서, 몸을 움직여 행동이 되지 못하고 펜만 움직이는 글쓰기, 타인이 아닌 오직 절대자에게만 정직한 기도, 앉아있는 30분 동안만 고요한 명상. 이들의 공통점은 독서가 책에서 끝나고, 글쓰기가 지면에서 끝나며, 기도가 십자가 앞에서 끝나고, 명상이 이부자리에서 끝나버려 자신의 삶 전면으로 비집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 수행들이 나의 근원을 두드려 일상을 헤집어 놓고 다닌다면, 평화로웠던 하루를 흔들어 대며 혼란을 몰고 온다면 그것은 자신을 살리는 튼튼한 동아줄이 틀림없다.

     

    하지만 동아줄을 오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소개하고 싶어 이 글을 시작했다. 쉽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읽고 쓸 줄 몰라도, 종교가 없어도 가능하니 더 보편적이다. 우선 동아줄을 꼭 쥔 두 손을 놓아버려라. 목이 꺾이도록 하늘 위만 바라보느라 보지 못했던 눈 앞의, 등 뒤의, 발 아래의 모든 세상에 나를 던지는 것이다. 줄을 쥐느라 쪼그라든 온 몸을 열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위로 오르느라 등한시했던 여타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다 떨어져 죽으면 어떡하냐고? 수행이라는 수단에 집착했던 내 자신이 죽는 것이다. 내가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吾喪我) 독서, 글쓰기, 기도, 명상 등 모든 수행은 결국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들을 철저히 해내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실제 삶에서 이해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배려심을 갖지 못하고, 사랑을 베풀지 못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못하며,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삶으로써 살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수행으로 지핀 뜨거운 열정은 삶을 달구지 못하면 빛 바랜 잿더미로 사그라들 뿐이다. 동아줄을 놓고 세상에 뛰어들라는 것은 삶에서 바로 실천하자는 뜻이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해보고, 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며, 관용을 베풀고, 유명인의 말이라고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해보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지키자는 것이다. 이것은 수권의 책과, 수십편의 글과, 수백 시간의 기도와, 수천 시간의 명상의 효과와 맞먹을 수 있는,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목적이자 수단이 되는 묘한 것이다.

     

    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지금 내 주변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와 180도의 각을 이루는, 정반대의 사람을 찾아 한껏 끌어안아보자. 내 몸과 정신을 총동원하여. 지평선 너머의 대척점을 향해 가슴을 열어보자, 그 곳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잠겨 죽어도 좋을 것처럼. 그 이방인과 더 뜨겁게, 더 끈적하게, 더 농밀하게 뒤섞여 경계를 잃어보자. 태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머지 절반의 세계를 열게 된다. 정과 반의 분별을 뛰어넘어 일체가 합일된 진실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 와서야 당신은 깨닫게 된다. 당신과 대립각을 이뤘던 그 사람을, 그의 세계를 내가 그 누구보다도 필요로 했음을.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눈이 눈꺼풀을 움찔대며 틈새를 벌린다. 눈 틈새를 비집고 들이치는 빛 속에서, 그 고요한 황홀경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두번째로 개안(開眼)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 비밀스러운 눈도 시력을 가지고 있어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데, 다만 정면에 달린 두 눈과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 눈은 세상의 모든 양극성을 하나로 건져 올리는 눈이다. 선이니 악이니, 좋으니 나쁘니 같은 분별의 딱지를 일거에 떼어버리는 눈이다. 세상을 그 자체로, 온전하게 쓰다듬는 눈이다. 있는 그대로의 만물을 그저 바라보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눈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늘려가며,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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