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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법의 아버지에서 질서의 아버지로 <사회혼란에 대한 라깡적-상징계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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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민석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112회   작성일Date 23-08-17 22:09

    본문

    혼란은 법의 대타자를 다시 불러들여야하는 지경이다.

    1. 혼돈의 대타자가 법의 대타자를 전복할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2.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3.이것의 부작용은 무엇인가?

    법의 대타자에게 짓눌렸던 주체들이 다시금 혼돈의 대타자를 자처하며 법의 대타자를 은밀하게 위반하는 대가는 아이러니 하게도 더욱 강력한 금지의 조항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문법의 차원에서이다.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에게 금기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성문법의 역할은 매우 협소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명 주체들은 성문법에 쓰여져 있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몸에 세기고 있다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선천적으로 태생적으로 내제해 있는 인간적 본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배운것일까? 바로 유아기 때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상징계의 대타자에 의해서이다. 상징계, 이것은 신경증자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계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신경증자들은 상징계 이전의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대타자와의 이자관계속에서의 쾌락을 박탈당했으며 그것의 보상 체계로 팔루스 즉, 아버지-대타자를 받아들였으며 믿게되었다.
     팔루스는 그 모양세 처럼 일자적 욕망을 대표하며 그 일자적 욕망은 강력하며 강압적이다. 하나의 규칙과 규율로써 지리멸렬한 상상계적 이자적 관계는 하나의 질서로 포섭된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기표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기표는 상징이다. 상징은 실재의 대척점으로 실재 그 자체의 은유다. 은유된 세계는 상징의 세계다. 그래서 상징계라고 명명된다. 상징계는 신경증자의 세계이며 기표에 의해 무엇보다도 아버지-대타자의 기표에 의해 지배된다. 기표는 한 번 은유된 후 즉, 거세됨 또는 쥬이상스의 핍진화 이후 환유의 과정을 거쳐 욕망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미끄러짐과 탈락의 과정(피보나치 수열)을 통해 주체를 완전한 쥬이상스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상징계는 사막과 같은 장소로 존재하게 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갈망 하듯 신경증자들은 상징계의 허점을 찾아다닌다. 또한 상징계는 은유된 계로써 완벽하게 주체를 포섭하지 못한다. 기표는 그 자체로 실재를 지칭할 수 없으니 이것은 불안정하다. 기표에 따라오는 기의는 주체가 마주하는 사건과 언제나 모순을 가져오고 불명료함을 수반하며 혼란을 야기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계의 일그러짐'과 더불어 가장 명료하게 다가오는 핍진화된 욕망에 의해 주체는상징계의 밖았을 우선 상징계의 억압을 위반으로 대응한다. 상징계의 사막을 벗어나기 위해 그러한 억압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일탈 위법 거부 기만 위법 사기 태만 부주의 폭력 등등 윤리와 거리가 먼 것들은 상징계의 억압에 벗어나기 위한 반동적 행위들이며 상징계의 논리들을 어지럽히는 그것 자체에 일종의 쾌락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상징계에서의 추방이며 그 추방은 곧 절대적 소외다. 물론 쥬이상스의 측면에서 상징계는 이미 주체에게서 소외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소외된 자들의 모임이며 그 모임에서 주체는 흔히 '인간적 삶'이라고 하는 달콤한 한조각의 디저트와 같은 잉여적 쥬이상스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상징계에서의 소외감은 주체를 절대적 소외감으로 죽은충동으로까지 몰아 넣는다. 더불어 상징계를 위반함으로써 대하는 자들과는 다른 상징계에 들어선 자들도 상징계적 신경증적 자아를 유지하는 자들도 그들의 상징계의 위반의 피해자가 된다. 상징계를 위반하는 것은 곧 상징계의 주체들까지 위협하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어쨋든 국가 사회의 질서이므로 흔히 정상인간이라고 불리는 자가 되려면 어쨋든 그곳으로 포섭되어야함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위반의 주체는 실천하는 자로써 또다른 실천자와 대척점을 이루고 상징계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상징계의 안정성에 균열을 가한다. 국가나 사회에 관점에서 법을 어겨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위반자들을 진정 통제하고 억제하고 싶다면 법을 강화시키는 것이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법이 강화된다면 법을 어기고 싶어함이 더욱더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질서 너머에서 쾌락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련의 행동은 (특히나 대안적 정치적 활동은)  규율의 대타자를 바로 세우는 것이며 언제든 넘어서야만 하는 욕망을 자극하는 대타자인 것이다.
    법이 기만당하고 상식이 무시되는 시대에서 더욱 강력한 질서 상식이 회복되는 시대로의 도약을 원하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판단이다. 하지만, 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너무나 빠른 상징계의 혼란이 찾아왔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혹여나 새로운 질서가 도래함이 성공한다고 해도 이것은 또 다른 억압이 다른 이름으로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이런식으로 보자면 이제는, 21세기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더욱 강력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차라리 동양적 어머니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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