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소개] 쪼그라진 심장을 쫙 펴자 <광주일보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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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그라진 심장을 쫙 펴자
2020년 08월 10일(월) 00:00가가
7월의 책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규정이 인간에게 있을 리 없다.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이 문화다.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야기된 변화의 총합이 문명이다. 인간에 관한 근본 규정에 접촉해 있는 자는 변화를 야기하고, 그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진 자는 누군가 앞서 야기해 놓은 변화의 결과를 허리 굽혀 줍는다.
한 쪽은 자유롭고, 다른 한 쪽은 종속적이다. 자유로운 진짜 인간은 한 곳에 멈춰 서서 머무르지 않고 별 소득이 없어보여도 애써 어디론가 건너간다. 이것을 문화적 활동이라고 한다. 건너갈 그곳은 익숙한 문법으로는 아직 해석되거나 이해되기 어렵다. 그래서 무섭고 이상하다고 소문난다. 일반적이지 않은 어떤 자는 여기에 무모한 도전과 모험을 쑤셔 넣어 무서움에 균열을 낸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고, 닿지 않는 별을 잡으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진짜 인간이다. 진짜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다.
‘건너가기’를 시행하는 자가 건너가는 자신을 직접 자각하고 경험할 때 그는 매우 ‘신비한 요동’ 속으로 빠지는데, 그것이 바로 황홀경이다. 황홀경(ecstasy)은 정해진 현재의 상태(stasis)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ex) 자에게 오는 신의 선물이다. ‘건너가는 자’는 아직 명료하게 해석되지 않은 것이 주는 공포와 위험(險)을 뒤집어쓰지(冒) 않을 수 없다. 모험(冒險)이다. 이러하니 모험(冒險)은 인간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위대한 탑을 쌓는 첫 번째 벽돌이다.
돈키호테는 인간의 ‘첫 벽돌’을 움켜쥐고 일반화된 자신(stasis)을 넘어서서(ex) 고유하고도 특별한 각성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높은 자가 되었다. 돈키호테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다.
돈키호테는 우선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쾌락을 나누던 취미인 사냥을 끊었다. 살아봐서 알지만, 친구들과 공유하던 취미를 혼자만 끊는 것도 어지간해서는 힘들다. 친구들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각오를 해야만 겨우 가능하다.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미치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생각과 취미를 공유하던 친구들을 끊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가진 땅을 팔아 책을 샀다. 책을 읽기 위해 땅을 팔고 사냥을 끊는 일이 미치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책으로 단련한 지적 탄력이 가장 강력하다. 읽는 양이 많아지고 탄력이 커지면, 경계를 넘고, 다시 또 넘고 하다가 결국 황홀경에 빠져 미친다. 결국 자신만의 세계로 진입하여 자신 만의 고유한 영토를 갖게 된다. 핵심은 주변의 시선이나 박수나 평가 등등을 과감히 무시하고, 자신 만의 세계로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일이다.
‘우리’에서 자신을 탈출 시켜 완전 고립을 완수한다. 유폐된 자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의 눈으로 자신 만을 바라보게 되면 황홀경에 빠져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풍차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거인이다. 모두가 양떼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군대다. 모두가 다 순례자라고 하는데도 그에게는 악당이다. 돈키호테의 종자인 산초 판사도 그것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미친 돈키호테는 승패를 미리 가늠하려고 애쓸 정도로 자잘하지 않다. 이길 수 없거나 닿을 수 없다고 미리 판단하여 물러서는 좀팽이는 아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그냥 하고, 닿지 않은 별이라도 그냥 따러 나설 뿐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빠지고, 책에 미쳐 전답을 처분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다. 황홀경에 빠진 자들만 불가능에 도전한다. 꿈을 꾼다. 계산이나 견적이 분명한 것들은 꿈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그럴 듯해 보이는 계획일 뿐이다. 불가능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 즉 명료하게 해석되거나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꿈이 바로 모험이고, 모험이 건너가기이며, 건너가는 자가 진짜 인간이다. 돈키호테는 이렇게 해서 진짜 인간에 등극한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만든 환영인 거인이나 악당이나 군대와 싸울 때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만큼 죽어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서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싸울 때는 힘을 쓰지도 않는다. 싸울 필요도 없이 상대가 굴복하기 때문이다. 아마 ‘돈키호테’ 전체에서 돈키호테가 진짜 무서운 것과 싸우는 장면은 한 번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살아있는 맹수를 상대로 싸운 것이다. 국왕에게 바치기 위해 우리에 실려 가는 사자를 보고 산초 판사를 비롯하여 정상적인 모든 이가 말렸지만, 미친 돈키호테는 사자 주인을 창으로 협박하여 우리를 열게 한다. 우리에서 나온 사자는 ‘정상적인 모든 사람’들이 걱정한 것과는 반대로 창을 들고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채 눈을 피하지 않는 돈키호테를 보고 뒤돌아 슬금슬금 우리로 다시 돌아갔다.
맥없이 끝난 전투지만, 이것이 ‘돈키호테’ 전편에 흐르는 백미들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은 삶의 승리가 ‘혼자 미친’ 돈키호테에게 있지 가치 판단을 공유하는 ‘많은 정상인’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쳐 황홀경에 빠진’ 단독자를 이길 보통의 평범한 것들은 없다. 보통의 정상적인 그들은 겁먹은 표정을 감추며 안전과 편안함을 찾아 다시 자신을 가두는 우리로 기꺼이 돌아갈 뿐이다. 쪼그라진 심장을 품고 스스로 갇힌다.
돈키호테는 집단적이고 편안한 정상(正常)을 포기하고 고독한 비정상의 황홀경을 선택했다. 그는 ‘우리’와 결별하여 ‘자신을 섬긴 자’다. ‘돈키호테’ 안에는 ‘덕’을 묘사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돈키호테의 말이다. “ 자네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네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덕(德)으로써 덕(德)스러운 일을 행한다면, 군주나 영주 같은 사람들을 조상으로 가진 가문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네.”, “가난한 자들도 덕스럽고 사려가 깊으면 그를 따르고 받들고 보호해주는 사람이 생기지.”
모든 승리의 원천을 덕으로 보는 것이 바로 돈키호테이다. 덕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이다. 자신에게만 있으면서 자신을 어디론가 건너가게 만드는 힘이 덕이라고 할 때, 자신과 덕은 일치한다. 당연히 모험도 덕의 활동이다. 모험심이 없는 자는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 즉 덕이 약하다. 이렇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사람에게 가장 수준 높은 일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라고 한다. “너 자신을 알고자 노력하면서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눈을 떠야만 한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인식이지” 이 힘든 인식을 통과한 자는 덕을 회복하고, 건너갈 수 있다. 문명을 건설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산초도 같은 말을 한다. “저는 왕을 제거하지도, 왕을 세우지도 않습니다요. 다만 저는 저를 도울 뿐이죠. 제가 저의 주인이니까요.” ‘돈키호테’는 우리로부터 이탈하여 ‘자신을 섬긴 자’가 남긴 황홀한 서사이다.
“체스게임이 계속되는 동안은 각각의 말이 자기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게임이 끝나면 모두가 한 데 섞이고 뒤범벅이 되어 주머니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건 목숨이 다해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요.” 산초 판사의 이 말은 자기는 자기로 존재할 때만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준다. 살아있는 자만 건너갈 수 있다. 자신을 섬기는 자는 자신에게만 있는 덕의 힘을 가진 자이므로, 그 힘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덕의 힘은 대개 궁금증이나 호기심으로 되어 있다. 그것들은 모험의 출항지 역할을 한다. ‘나를 섬기는 자’는 당연히 외부에 호기심을 가지고 열려 있으므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다.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사는 사람은 호기심 어린 덕보다는 우리끼리 공유하는 가치관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 가치관을 즉각적으로 적용하는 데에 바쁘지 혼자 생각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중하지 않고 분별력이 없다. ‘돈키호테’ 안에 ‘분별력’이니 신중함’이니 하는 단어가 4~50번 이상이나 나오는 것도 돈키호테는 자신을 섬기는 자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자’보다 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이치상 매우 당연하다.
돈키호테는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다.” 혼자로 미쳐 살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구사하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와 누구나 사용하는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죽는다. 비정상으로 살 때는 자기였는데, 정상으로 돌아와서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미쳤을 때는 풍차에도 덤볐으나, 정상으로 돌아와서는 고작 흔해빠진 유언과 고해나 준비하는 자잘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크고 굵게 살다가 좀팽이로 죽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해 돈키호테가 하고 싶었던 단 한 마디의 말은 무엇일까? ‘돈키호테’ 안에서 다 버리고 단 한 줄의 문장만 남긴다면 무엇을 남길까? 나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이 문장을 고른다. “쪼그라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그러면 나쁜 운수도 부수어 버립니다.” 우선 쪼그라진 심장부터 쫙 펴자! 좀팽이처럼 자잘해지지 말고, 크고 굵게 살자. <최진석 새말새몸짓 이사장>
※ 8월에 함께 읽는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광주일보 8월 3일자 16면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596380400701147315>입니다.
‘건너가기’를 시행하는 자가 건너가는 자신을 직접 자각하고 경험할 때 그는 매우 ‘신비한 요동’ 속으로 빠지는데, 그것이 바로 황홀경이다. 황홀경(ecstasy)은 정해진 현재의 상태(stasis)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ex) 자에게 오는 신의 선물이다. ‘건너가는 자’는 아직 명료하게 해석되지 않은 것이 주는 공포와 위험(險)을 뒤집어쓰지(冒) 않을 수 없다. 모험(冒險)이다. 이러하니 모험(冒險)은 인간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위대한 탑을 쌓는 첫 번째 벽돌이다.
송필용 작 ‘쪼그라진 심장을 쫙 펴자’ |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가진 땅을 팔아 책을 샀다. 책을 읽기 위해 땅을 팔고 사냥을 끊는 일이 미치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책으로 단련한 지적 탄력이 가장 강력하다. 읽는 양이 많아지고 탄력이 커지면, 경계를 넘고, 다시 또 넘고 하다가 결국 황홀경에 빠져 미친다. 결국 자신만의 세계로 진입하여 자신 만의 고유한 영토를 갖게 된다. 핵심은 주변의 시선이나 박수나 평가 등등을 과감히 무시하고, 자신 만의 세계로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일이다.
‘우리’에서 자신을 탈출 시켜 완전 고립을 완수한다. 유폐된 자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의 눈으로 자신 만을 바라보게 되면 황홀경에 빠져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풍차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거인이다. 모두가 양떼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군대다. 모두가 다 순례자라고 하는데도 그에게는 악당이다. 돈키호테의 종자인 산초 판사도 그것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미친 돈키호테는 승패를 미리 가늠하려고 애쓸 정도로 자잘하지 않다. 이길 수 없거나 닿을 수 없다고 미리 판단하여 물러서는 좀팽이는 아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그냥 하고, 닿지 않은 별이라도 그냥 따러 나설 뿐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빠지고, 책에 미쳐 전답을 처분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다. 황홀경에 빠진 자들만 불가능에 도전한다. 꿈을 꾼다. 계산이나 견적이 분명한 것들은 꿈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그럴 듯해 보이는 계획일 뿐이다. 불가능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 즉 명료하게 해석되거나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꿈이 바로 모험이고, 모험이 건너가기이며, 건너가는 자가 진짜 인간이다. 돈키호테는 이렇게 해서 진짜 인간에 등극한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만든 환영인 거인이나 악당이나 군대와 싸울 때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만큼 죽어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서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싸울 때는 힘을 쓰지도 않는다. 싸울 필요도 없이 상대가 굴복하기 때문이다. 아마 ‘돈키호테’ 전체에서 돈키호테가 진짜 무서운 것과 싸우는 장면은 한 번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살아있는 맹수를 상대로 싸운 것이다. 국왕에게 바치기 위해 우리에 실려 가는 사자를 보고 산초 판사를 비롯하여 정상적인 모든 이가 말렸지만, 미친 돈키호테는 사자 주인을 창으로 협박하여 우리를 열게 한다. 우리에서 나온 사자는 ‘정상적인 모든 사람’들이 걱정한 것과는 반대로 창을 들고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채 눈을 피하지 않는 돈키호테를 보고 뒤돌아 슬금슬금 우리로 다시 돌아갔다.
맥없이 끝난 전투지만, 이것이 ‘돈키호테’ 전편에 흐르는 백미들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은 삶의 승리가 ‘혼자 미친’ 돈키호테에게 있지 가치 판단을 공유하는 ‘많은 정상인’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쳐 황홀경에 빠진’ 단독자를 이길 보통의 평범한 것들은 없다. 보통의 정상적인 그들은 겁먹은 표정을 감추며 안전과 편안함을 찾아 다시 자신을 가두는 우리로 기꺼이 돌아갈 뿐이다. 쪼그라진 심장을 품고 스스로 갇힌다.
모든 승리의 원천을 덕으로 보는 것이 바로 돈키호테이다. 덕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이다. 자신에게만 있으면서 자신을 어디론가 건너가게 만드는 힘이 덕이라고 할 때, 자신과 덕은 일치한다. 당연히 모험도 덕의 활동이다. 모험심이 없는 자는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 즉 덕이 약하다. 이렇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사람에게 가장 수준 높은 일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라고 한다. “너 자신을 알고자 노력하면서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눈을 떠야만 한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인식이지” 이 힘든 인식을 통과한 자는 덕을 회복하고, 건너갈 수 있다. 문명을 건설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산초도 같은 말을 한다. “저는 왕을 제거하지도, 왕을 세우지도 않습니다요. 다만 저는 저를 도울 뿐이죠. 제가 저의 주인이니까요.” ‘돈키호테’는 우리로부터 이탈하여 ‘자신을 섬긴 자’가 남긴 황홀한 서사이다.
“체스게임이 계속되는 동안은 각각의 말이 자기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게임이 끝나면 모두가 한 데 섞이고 뒤범벅이 되어 주머니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건 목숨이 다해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요.” 산초 판사의 이 말은 자기는 자기로 존재할 때만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준다. 살아있는 자만 건너갈 수 있다. 자신을 섬기는 자는 자신에게만 있는 덕의 힘을 가진 자이므로, 그 힘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덕의 힘은 대개 궁금증이나 호기심으로 되어 있다. 그것들은 모험의 출항지 역할을 한다. ‘나를 섬기는 자’는 당연히 외부에 호기심을 가지고 열려 있으므로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다.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사는 사람은 호기심 어린 덕보다는 우리끼리 공유하는 가치관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 가치관을 즉각적으로 적용하는 데에 바쁘지 혼자 생각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중하지 않고 분별력이 없다. ‘돈키호테’ 안에 ‘분별력’이니 신중함’이니 하는 단어가 4~50번 이상이나 나오는 것도 돈키호테는 자신을 섬기는 자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자’보다 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이치상 매우 당연하다.
돈키호테는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다.” 혼자로 미쳐 살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구사하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와 누구나 사용하는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죽는다. 비정상으로 살 때는 자기였는데, 정상으로 돌아와서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미쳤을 때는 풍차에도 덤볐으나, 정상으로 돌아와서는 고작 흔해빠진 유언과 고해나 준비하는 자잘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크고 굵게 살다가 좀팽이로 죽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해 돈키호테가 하고 싶었던 단 한 마디의 말은 무엇일까? ‘돈키호테’ 안에서 다 버리고 단 한 줄의 문장만 남긴다면 무엇을 남길까? 나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이 문장을 고른다. “쪼그라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그러면 나쁜 운수도 부수어 버립니다.” 우선 쪼그라진 심장부터 쫙 펴자! 좀팽이처럼 자잘해지지 말고, 크고 굵게 살자. <최진석 새말새몸짓 이사장>
※ 8월에 함께 읽는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광주일보 8월 3일자 16면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59638040070114731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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