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끊임없이 건너가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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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이 건너가는 존재 >
여기 끊임없이 어디론가 떠나는 존재가 있다. 그의 이름은 걸리버. 장장 16년 7개월의 기간을 떠나 있었고 걸리버 여행기는 그 파란만장한 여정의 기록이다. 여정의 시작은 생계를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첫 여정을 끝낸 후 걸리버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해 떠나지 않는다. 무수한 사건과 좌충우돌,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는 떠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떠나는 것이 곧 존재의 의미가 되어버린 걸리버. 그는 떠날 때마다 아주 우연히 기상천외한 시공간으로 던져진다. 소인국 릴리펏, 거인국 브롭딩낵, 하늘의 왕국 라퓨타, 말들이 지배하는 흐이늠까지. 모든 곳은 그가 살던 영국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생김새, 언어, 문화, 생각하는 방식까지. 하지만 걸리버는 생소함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이방인 또는 경계인으로만 남지 않는다. 낯선 것들을 포옹하는 마음가짐, 모든 생소함을 습득하려는 지식욕,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는 세심한 관찰력. 걸리버는 이러한 덕목으로 마주한 낯선 세상마다 그 세계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건너가기'란 이것으로부터 저것으로 옮겨가는 행위이다. 걸리버가 단순히 여정을 떠나 시공간을 옮기는 행위와 더불어 마주한 세계의 진면목을 보게 한 모든 총체적 행위를 '건너가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 내가 서있는 익숙한 것이다. 익숙하기에 내가 안주하는 것이며 편안한 것이다. 따라서 정체되어 있는 속성을 가진다. 저것은 내게 익숙지 않은 미지의 것,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과 호기심이 뻗쳐있는 곳이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물질적, 정신적, 시간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운동의 속성을 가진다. 저것을 향한 운동은 근육을 움직이고 피를 돌게 하며 두뇌를 활성화시킨다. 또한 운동이 일으킨 시공의 변화는 여러 마주침을 낳고 마주침은 갖가지 사건, 사고를 발생시킨다. 이것을 통틀어 생명력의 약동이라 한다. 정체는 고립을 향하며 고립은 곧 죽음을 야기한다. 운동은 순환을 향하며 순환은 곧 생명의 발현이다. 하여, 걸리버는 생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건너가기 속에 생명력을 약동하여 존재의 살아 있음을 느낀다. 걸리버가 그토록 끊임없이 떠나고자 했던 이유일 것이다.
< 깨어있다는 착각 >
소인국 릴리펏은 위대한 군주 아래 창의적인 능력을 가진 관료조직이 나라를 이끌고 있다. 수학자들은 왕의 곁에서 나라의 살림과 운영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도시는 정교하게 구획되어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다. 왕은 용맹했으며 고관대작들은 대중의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적이고 잘 통제된 국가에서 고작 계란을 깨 먹는 방식으로 촉발된 정치적 갈등으로 이웃나라와 몇 년째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릴리펏은 자성은커녕, 아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인국 브롭딩낵에서는 걸리버가 왕에게 영국을 소개하는 모습이 주목할 만하다. 걸리버는 영국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사소한 사항들도 빼놓지 않고 왕에게 설명한다. 정치, 사법, 행정, 교육, 종교, 오락에 까지. 그러나 왕은 영국에 대한 감탄은 고사하고 그 일들이 탐욕, 파당, 위선, 배신, 잔인, 분노... 등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왕은 온갖 모순으로 점철된 영국의 권력 구조와 제도를 하나씩 꼬집는다. 그리고는 결정타를 날린다. "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
이성적인 소인국도, 지적인 걸리버도 자신이 속한 곳은 매우 합리적인 세상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내부에서는 내부의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축적된 관습, 통념, 습관은 개인에게 전습되고 우리는 대부분 아무런 질문과 환기 없이 주어진 길을 그대로 밟아 간다. 그러한 삶에 따르는 결과물에 만족하게 되면 스스로 깨어있다는 착각에 빠지며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차게 된다. 특히 자부심과 확신에 차 있는 것일수록 깨어있다는 깊은 착각의 늪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타자의 시선으로 보는 소인국과 영국은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관습과 통념, 오만과 편견이라는 견고한 중력장에 묶여 내부에서는 결코 직시할 수 없는 것들이,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타자의 시선으로는 아주 쉽고 명확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신념과 확신에 차있는 것들을 타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보기. 이것이 우리를 깨어있다는 착각으로부터 깨어있게 하는 방법이다.
< 스위프트가 바라본 미래, 라퓨타 >
스위프트는 거인국, 소인국을 통해 영국의 정치, 권력, 제도를 비판하며 더 나아가 문명의 부조리함을 까발린다. 흐이늠을 통해서는 철저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인간 본성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라퓨타는? 라퓨타는 릴리펏, 브롭딩낵, 흐이늠의 완성 후 가장 늦게 쓰였다. 인간의 본성까지 파고든 스위프트에게 눈을 돌릴 곳은 인간의 미래였을 것이다. 공중으로 부양한 도시라는 라퓨타의 배경 또한 미래 문명을 암시한다. 놀라운 건 스위프트가 라퓨타를 통해 내다본 미래 문명이 지금 우리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라퓨타의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이곳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말하고 듣는 기관에 외부적인 접촉을 가하여 깨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말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주목할 수도 없었다." 마치 오늘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스마트폰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이다. 라퓨타인들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장면은 스마트폰에 몰입된 우리와 같다.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공부하면서, 일하면서, 밥 먹으면서, 잠들 때까지.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며 스마트폰에 흡수된 신체! 생각에 잠긴 라퓨타인이 눈 앞에 있는 아내가 외간 남자와 놀아나는 것도 모르는 장면에서는 오늘날 연인이 포옹한 채 등 뒤에서 서로의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남자는 늘씬한 여자 연예인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혼잡한 거리에는 스마트폰에 몰입되어 발생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경고 표지판이 붙어있다. "보행 중 스마트폰 주의" 아무런 자극도 없는 고정된 표지판이 스마트폰에 빠진 인간을 과연 깨울 수 있을까? 조만간 라퓨타의 치기꾼과 같은 존재가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라퓨타인들은 오로지 사변적인 생각으로 인해 정신세계가 소위 '안드로메다'에 가 있다. 방대한 앎으로 인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는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하나마나한 걱정들로 이들은 "침대에서 조용히 잠들지도 못하고, 일상에서 나타나는 평범한 즐거움이나 오락도 즐기지 못한다." 마치 오늘날 방대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가 도리어 우리의 목을 죄고 있는 형국을 보여준다. 넘쳐나는 정보에 우왕좌왕 선택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 실제 하지 않는 불안에 떨며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 각종 매체의 주입된 공포로 건강염려증에 빠진 사람들.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는 문명의 혜택이자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하는 문명의 폐해이다.
그밖에 학술원에서 연구되는 언어의 축소화는 오늘날 시각을 도배해버린 이미지의 범람으로 읽기와 말하기 능력이 감퇴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스트럴드브럭을 통해 과학의 발전으로 더욱 촉발되는 영생에 대한 인간의 비루한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스위프트가 내다본 미래 문명은 디스토피아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명의 폐해가 라퓨타에 고스란히 오버랩되어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퓨타는 여행기의 가장 흥미로운 단락이다.
< 주체에서 종속으로 >
라퓨타로의 여정 후 또다시 떠나는 걸리버. 이번에는 시작부터 고난이다. 걸리버의 배는 해적선에게 탈취당하고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다. 해적들에게 떠밀려 도착한 미지의 곳은 말들이 지배하는 나라 흐이늠. 걸리버는 그곳에서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는 끔찍한 존재와 마주한다. "나는 여태까지 온갖 여행을 많이 했지만, 이 정도로 불쾌한 느낌을 주고, 또 이 정도로 커다란 반감을 일으키는 동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멸과 혐오감을 견디지 못하면서 저 동물은 이제 그만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야후라고 불러졌다. 걸리버는 야후를 곧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추악함이 인간의 모습과 꼭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끔찍한 야후들과 대비되는 존재는 이 왕국을 지배하는 말들인 흐이늠이다. 그들은 고결한 존재다. 걸리버는 흐이늠의 덕성에 감화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 "타락한 인간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저 훌륭한 네발 동물의 많은 미덕으로 인해 나는 진정한 지혜에 눈을 떴고 이해력도 넓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무척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보기 시작했고, 동족의 명예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걸리버는 완전무결한 흐이늠의 존재를 찬미한다.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혐오스러운 야후, 인간에게 환멸을 느낀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혐오스러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나 다를까.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걸리버는 야후와 같은 끔찍스러운 인간들을 피해 자신의 집에 칩거한다. 가족들을 보는 시선 또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다. 걸리버는 돌아와서도 고결한 흐이늠을 느끼고 싶은 욕망에 어린 종마 두 마리를 사서 그들과 교감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살아간다.
걸리버는 해적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마저도 내던져진 상태에서 야후를 만나게 된다. 인간에 대한 환멸은 혐오스러운 야후를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때마침 조우한 고결한 존재 흐이늠은 이상적인 덕성으로 걸리버에게 구원의 안식처가 된다. 그리고 그들을 신과 같이 찬양하기에 이른다. 흐이늠이라는 이상적인 존재의 유토피아가 세워진 것이다.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고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는 존재인 걸리버의 삶이 주체적인 삶에서 종속적인 삶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종속적인 삶의 방향은 오직 주인이라는 한 곳을 향해 있다. 이것은 곧 걸리버의 '건너가기'가 중단되었음을 의미한다. 흐이늠이라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내재하였기에 더 이상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으니 떠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실제 걸리버의 삶도 그러하다. 흐이늠으로의 여정이 끝난 후 걸리버는 더 이상 떠나지 않는다. 집 밖으로 조차 나오지 않으며 가족들과의 관계도 온전치 않다. 오직 흐이늠을 향한 맹목으로 현실세계에 발 딛지 못하는 걸리버. 앞서 말했듯이 오직 한 곳을 향해 있는 정체의 상태가 고립을 만들어낸 것이다. 걸리버는 야후인 인간들을 교화시킬 것을 다짐하며 여행기의 끝을 마무리한다. 어떻게든 역겨운 야후들과 잘 어울려 살기를 희망하지만 아마도 뜻대로 되기는 힘들 것이다. 흐이늠의 덕성과 유토피아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헛된 희망이 오히려 걸리버를 더욱 고립의 늪으로 빠지게 할 것이다.
문제는 삶의 방향이다. 흐이늠이라는 유토피아의 종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건너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주체적인 삶으로의 방향 전환! 걸리버의 생명력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는 미지의 곳으로 끊임없이 떠나는 것만이, 그를 고립의 늪에서 꺼내 줄 구원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세계와 마주치고 온갖 사건을 겪으며 그 속에서 다시 인간에 대한 희망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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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남님의 댓글
오차남 작성일 Date
어릴적 거인국소인국만 읽은 기억이 있는 걸리버여행기.. 아직 다시 읽어보지 못했네요..
재윤님의 걸리버여행기 서평을 보며 또 감탄!!
책속에서 이렇게 많은 깨달음을 얻는 높이까지 올라 계시는 재윤님의 통찰~
깨어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 깨어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속적인 삶이 도처에 있음도 생각하게 해주는 서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