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3기] "다름"이 '틀림'이라는 포식자(채식주의자-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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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틀>
인공위성 GPS로 주인공을 들여다보듯 이 책의 전개는 다양한 타인의 시선들이다. 채식주의를 시작하게 된 아내를 바라보며 일상이 파괴되는 남편의 시선, 예술적 욕망의 대상으로 처제의 몽고반점에 집착해 결국, 파국을 맞는 비디오 예술가 형부의 시선, 그리고 끝까지 영혜를 돌보는 친언니의 시선이 그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영혜의 내면은, 일반화로 편중되어 판단에 익숙한 우리로부터 피해자로 침묵한다.
<정상성의 일탈>
평범한 삶을 살던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꾸면서부터 고기 먹기를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육식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단에도 폭력을 휘두르며 고기 먹을 것을 강요했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영혜에게 각인됐던 가부장적 폭력의 기억에 불씨를 던졌다. 순간, 영혜의 채식주의는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를 넘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길들어진 자기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저항이 된다.
끈질긴 가족들에게 ‘평범함’의 궤도 이탈과 하나로 정의 내려지는 것에 대한 부정은 병리적이었다. 그녀를 정상의 범주로 돌려놓기 위해 고기를 먹이려 했고, 치료받게 하고, 정신병원에 가뒀다. 누구라도 정상적일 수 없는 곳이라서일까? 루주가 번진 듯 피에 젖은 영혜의 입술에서 동박새는, 그녀 역시 잔인한 가해자라 말하는 잠재된 포식자 적 본능이었다.
그녀는 두 사건을 계기로 더욱 집요하게 육식을 거부한 채 물과 햇빛만으로도 살아가는 나무가 되기를 꿈꾼다.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는 거치지 못했던 브래지어처럼 그녀의 몸을 구속할 수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꿈속 내면의 저항과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존재의 일탈을 꿈꾸는 강렬한 몸짓이 애처로웠다. 누구 하나 그녀를 이해하기보다는 정상의 틀 안에 맞추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며 억압했고, 침범했다.
<파괴인가, 해방인가>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에서 [왜 사람들은 내가 존재하는 것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데도 그 사회를 위해 일을 하며,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사회 규약들을 지키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 사회가 나에게 너무 짐이 될 때는 과연 누가 ‘나’로 하여금 이 사회를 스스로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자살은 당연히 피하고 배척해야 할 행위’라 고수하는 내게, 자살 수용과 권장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이 의문은 꽤 충격적이었다. 영혜 또한 육식을 거부한 선택이 일반적이고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을 때, 거식증을 넘어 다른 생명에게조차 무(無)해한 존재를 꿈꾼다. 끝까지 스스로를 지키려는 영혜의 선택은 곡기 끊기의 자살과 닮아있다. 누가 그녀를 뇌 몰았는가? 그녀의 선택은 사회적 규범과 세상의 폭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파괴인지 해방인지, 그녀의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절박한 선언이고 여전히 해석되지 않은 고통과 저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고기를 모두 폐기하고 남편에게조차 고기반찬을 주지 않은 것은, 부인과 주부의 역할에 합당했는가? 나와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더불어 살지 못하는 사회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나는 ‘나’다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길들여 살아가고 있는가? 사회가 요구하고 우리가 믿어 온 정상적인 규범의 경계는 어디까지였던가?
<다름은 ‘나’다움>
끝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장 난 회전문 안에서 쳇바퀴를 돈다. 아버지의 폭력성에 자랐던 마음의 멍이 몽고반점으로 올라와 말 없는 영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온몸에 꽃을 담은 영혜는 그때부터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몽고반점이 꽃으로 만개했던 자유 안에서, 암술과 수술 사이로 강렬하게 충동질 됐던 성적 욕구의 낯선 자발성.
사랑과 수용이라는 밭에서 몽고반점이란 씨앗은 꽃으로 피어났다. 아버지의 폭력과 남편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죽어버린 영혜의 상처에 충분한 숨을 불어넣었다. 보드라운 어루만짐은 몽고반점을 치유했고, ‘나’다움을 깨워냈다. 영혜의 몸은 가족과 사회의 통제, 예술적 욕망, 그리고 자신의 급진적 변형 욕구가 충돌하는 장소였고,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였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사회적 규범과 의무에 충실하면서 ‘나다움’을 묵인한 채, 여전히 견뎌내며 살아간다. 무수히 많은 인혜처럼.
막장에서 나를 놔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비겁했다’ 안쓰러운 책망도 없이, 그 용기마저 부러운 사람들로 얽혀서 메꿔져 있는 의무와 책임.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데로, 생각하게 된다. 정상성과 평범함 속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잔인한 가해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붙잡고 있지 않으면 잃게 된다. 그 모든 평범한 것으로부터 특별한 나를. ‘나’를 ‘나’이게 하는 고유함이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존중받는 사회에, 나의 흔적을 벌써 흩뿌려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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