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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 2기] 세 가지 이유(류성룡_징비록)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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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선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264회   작성일Date 24-04-17 21:06

    본문

    세 가지 이유

     

    새문장 2기 이선영

     

       소리. 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으면 보통은 어떤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징비록의 책장을 열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통곡으로 청각이 열리는 경험. 전쟁의 참혹한 상황이 시각적으로 펼쳐지는 것보다 비명, 굉음, 깊은 한숨 등 날카롭고 뾰족한 소리가 한데 뒤엉켜서 들리는 몸의 반응이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씩 천천히 읽어 나갔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징검돌처럼 글자를 건너뛰다 보면 하얀 여백이 갈라지고 그 틈새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성룡의 낮은 음성. 420년의 시간을 통과해 전해지는 한 늙은 남자의 간절함이 담긴 말들. ()’. ‘아픈 적이 있어 경계할 줄 안다.’ 전쟁 통에 겪은 통탄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기를, 후손들이 다시 이런 고통에 놓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통곡하며 쓴 글이라 소리의 감각으로 몸이 반응했던 걸까? 참혹한 전쟁을 겪지 않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살펴야 하는지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문장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일상에서 펼쳐지는 오늘의 일이 전쟁처럼 느껴지는 당신이라면 말이다.

     

      하나, 아는 것의 힘!

       다급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한 가운데,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신속한 판단은 생과 사를 가른다. 국가 단위의 최고 권력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문제 상황 속에 있다면 그것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을 선명하게 떠올리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지력 총동원될 때다. 복잡한 상황, 정세와 맥락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통찰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시기. 국가 존폐를 확률 게임으로 던져놓을 수 없기에 권력은 지적으로 탁월한 자들이 쥐어야 한다. 무능한 자들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서서히 가라앉는 배를 그저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참혹한 현실은 반복된다. 실패의 원인을 알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복기하고 분석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면밀한 분석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안다. 알아야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적용하고 실행한 만큼 현실은 달라진다. 그렇기에 현실로 드러나는 모든 실체는 지적 활동의 결과다. 아는 것이 힘이다!

      류성룡은 쓴다. 옛 사람이 말한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는 내주게 된다.’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훗날의 경계를 삼을만하여 자세히 적는다.” (p77)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분석해 그 실패의 원인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일. 아는 힘을 키워 다시는 실패를 겪지 않도록 현실로 적용하도록 애써보는 그의 몸짓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태평성대는 계속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변한다. 변화의 방향과 흐름을 읽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려는 긴장의 태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약탈과 살육, 야만을 견디는 참혹한 고난의 시간을 맥없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알려고 애써야 하며 아는 것을 체계화하여 지식의 영역으로 견고히 다져야 한다. 평화는 전쟁과의 팽팽한 긴장 사이에 놓인 것이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행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문제에 끌려다니며 그저 고통을 견디고 참아내는 것이 아닌 그 실체가 무엇이고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덤벼야 아는 것의 힘으로 해결을 문고리를 잡을 수 있다. 아는 힘은 행동력을 키운다. 행동으로 드러나야 진짜 아는 것. 너무나 당연하기에 쉽사리 잊히는 일, 아는 것의 실천을 부지런히 하라는 진리를 류성룡의 나직하고 강렬한 목소리로 듣는다.

     

       두울, 쓰는 자의 용기

       아픈 기억을 되짚어 생생하게 다시 떠올리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기에 어떤 기억은 상실을 선택한다. 기억상실은 살기 위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생존방식이다. 반면 괴로웠던 시간을, 통탄스러운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의, 과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의 용기 있는 선택이다. 기억의 복기, 기록의 힘으로 아픈 과거를 용감하게 대면하여 그것을 넘어서 보려는 시도다. 넘어진 자리 딛고 일어설 수 있듯 실패는 직시해야 극복할 수 있다. 게다가 실패의 기억이라면 왜곡되거나 정당화되기도 한다. 권력자의 시선으로는 기록되지 않는,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도 또한 용기 있는 자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이렇게 했어야 왜의 마음이 놀라고 담력이 깨져서 이후 수백 년간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하고 다시 후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쇠약할 대로 쇄약해져서 힘을 내지 못하였으며, (중략) 어찌 한탄하며 어찌 다 애석해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이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주먹이 쥐어진다.”(p300) 7 전쟁의 시간을 돌이키며 마주해야 했던 고난의 기억 앞에서 다시 겪는 고통. 그럼에도 쓰는 자 류성룡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과거의 시간을 직면하여 현재에서 복기해보고 다시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쓰는 자의 용기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사라질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그 누군가도 그런 용기를 내보도록 하는 도끼가 된다. 그래서 책은 도끼다. 나의 과거를 내리찍어 다른 길을 내며 더 나은 생을 살도록 하는 도구. 오늘이 전쟁 같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전쟁을 글로 쓸 용기, 고통의 기억을 직면하여 실체를 마주할 용기를 징비록에서 얻는다.

     

       세엣, 그럼에도 사람!

       오늘을 사는 사람이 내일의 사람을 걱정할까? 먼 훗날, 후세의 시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 깨달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주려 한다.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다. 자신이 겪은 고난의 현실에 길을 내어 내일의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그러니 기록을 남기는 자는 보지도 만날 수도 없는 먼 미래의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품는다. 미래의 실패와 고통을 제거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 이순신, 곽재우, 권율,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등 징비록에서 수많은 과거 사람을 만난다나라 가족이든 소중한 무엇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헌신과 무수한 목숨값으로 우리는 평화로운 오늘을 산다. 알 수도 없는 옛사람들의 사랑이 모여 꺾이고 뭉쳐서 거대한 한국사의 줄기를 타고 이어져 왔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무언가를 향한 사랑의 무늬를 그려가는 릴레이는 아닐까?

       420년 전,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방안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의 역사를 꼿꼿하게 앉아 써내려간 한 사람의 마음이 전해진다. 후대를 향한 누군가의 사랑의 힘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에 있다. 전쟁의 기록을 담은 딱딱한 역사책이 아니다. 한 인간의, 사랑 가득한 한 사람의 눅진한 마음이 담긴 따뜻하고 소중한 유산임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오늘이 지치고 힘들어 주변 사람 모두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면, 실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의 사랑의 힘으로 오늘의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을 속삭이듯 알려준다.

     

      겪지 않고 안다고 말하면 안 된다. 편견과 서툰 판단으로 옛사람의 생각이 고루하거나 진부하다고만 여겨진다면 다시 고전을 펼치겠다. 아는 것의 힘, 실패의 고통을 직면할 용기와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배짱이 차오른다. 달이 차오르듯! 무엇보다 전혀 관련 없다고 여겼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몇백 년 전의 사람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도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책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은 이토록 통쾌한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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