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2기] 길(路) 위에서 길(道)을 찾다 (연암 박지원_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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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운전 도중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듣다가 ‘경로 이탈’이라는 말이 생각의 그물에 걸려든다. 아는 길이나 늘 다니던 길로만 가는 건 안정감은 있지만 변화를 생성하는 자극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경로를 이탈해 안 가본 길을 선택한다. 일상도 마찬가지여서 똑같은 반복에 권태가 느껴질 때면 종종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일상이라는 경로를 이탈하여 새로운 자극을 얻고자 떠나기 전 챙겨야 할 귀찮은 일들도 마다하지 않고 길 위에 기어코 선다. 의도된 경로 이탈의 여정! 고대 자연철학자 에피쿠로스학파의 ‘클리나멘’이 떠오른다. 기울어져 벗어난다는 의미의 라틴어인 클리나멘은 원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다가 일정한 에너지 이상을 얻으면 다른 원자핵으로 이동하는 ‘예측할 수 없는 이탈’을 뜻한다. 일상에서 고유한 질량과 속도를 발견해서 변화를 이끄는 것 또한 이탈이라면,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여행이라는 경로 이탈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가고자 한다. 낯선 경이의 장면을 목격하여 기존의 내가 흔들리고 재구성되는 경험 속에 스스로 놓여 본다. ‘열하’로 가는 낯설고 험난한 길 위에서 연암의 탁월한 시선으로 펼쳐지는 사유의 기록은 내게 쾌변의 시원함과 오묘한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길이 경계에 있으니 사이를 탐색하며 더 높은 시선으로, 주체적 사유의 힘으로 길 위에서 길을 찾은 연암. 당시에는 없었던 탐험가의 기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조선의 변화를 모색했던 그의 문장들이 탁월하고 싶은 나를 자극 한다. 훔치고 싶은 탁월한 자의 시선과 사유!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의 시선이 품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생경하고 낯선 장면을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로 그것들을 대하였던가. 이색적인 경험을 하고자 떠난 여행지에서조차 익숙하고 아는 것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그 반대의 경우는 불편함과 두려움의 부정적 감정을 안겨준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익숙한 방식이나 아는 대로 또는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하지만 연암은 기존의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읽고 풀어낼 수 있는 목격자의 시선을 지녔다. 알던 대로, 자신의 관점대로 외부의 현상이나 장면을 보는 것, 즉 보려는 대로 보지 않는다. 대신 보이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본 것을 해석하는 태도 역시 지성인의 그것이다. 호기심으로 새로운 것들을 대하여 이미 아는 것의 틀 속에 가두지 않고 열린 마음과 유연한 태도로 생경한 것들을 대한다. 그러고는 그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인정한다. 당시 대개의 조선 사람들이 무시하는 외놈의 것들에서 청나라의 우수성과 백성들의 삶의 윤택함을 이끈 이용과 후생의 힘을 읽어 낸다.
“중화는 중화일 뿐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다. …(중략)…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온 것일지라도 마땅히 수용하여 본받아야만 한다. …(중략)…나는 비록 삼류 선비지만 감히 말하리라. 중국의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 덩어리에 있다.”
또한 연암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경이’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그것이 왜 놀라운지 지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한다. 감정과 이성의 영역이 서로를 자극하고 균형을 유지하며 사유의 깊이와 높이를 깊고 높게 끌어 올린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이 높은 자가 지니는 능력이다. 경이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지성의 확장 기회로 삼는 것이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확인하려 덤벼든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려는 호기심의 안테나를 곧게 세우며 자신이 놓인 현실의 영역에 적용해 보려 애쓴다. 목격한 것에서 그간 몰랐던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 또한 수용한다. 자기 성찰이 가능한 사람은 객관적인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고 한계를 극복하여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품는다. 경이로움 앞에 그간 나는 어떤 선택을 했었던가. 그저 경이의 짜릿함을 느끼고 마는 감정 롤러코스터 타기에 그치지는 않았던지. 나를 흔들고 깨워 바꿀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면 내게 오는 경이의 순간마다 상승의 기류를 타는 성장의 기회,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나는 오늘에서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정해진 것, 이미 있는 것, 알고 있는 것, 옳다고 믿는 것 등은 딱딱한 과거의 것들이다. 말캉한 현재와 오지 않아 투명한 미래를 과거의 고정된 기준을 적용하며 경직된 판단을 하고 관성대로 결정 한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를 멈추어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의 습관이 중력처럼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 부력을 생성하지 못한다. 그냥 하던 대로 한다. 보던 대로 보고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여 변화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변하여 흐른다는 진리를 거슬러 고이고, 결국은 썩는다. 그러나 액체의 유동성을 지닌 연암의 사유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흐르는 물줄기처럼 유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변화를 이끈다. 여러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고 낯선 곳에서 낯선 자를 만나 묻고 또 물으며 스스로 길을 묻고 답을 찾으며 계속 간다. 무엇보다 그 몸짓은 유쾌하고 대화는 명랑하다. 무겁게 흐르지 않고 경쾌한 고유의 리듬을 만들어 약진하는 연암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시원함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생경한 것들을 포용하며 ‘뭣이 중헌디’라는 질문의 답을 명쾌하게 풀어 놓는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범람하는 강을 목숨을 걸고 건너며 마침내 도를 깨닫는다. 모든 것이 마음 안에 있음을 말이다. 스스로를 묶어두는 ‘거짓 자아’의 그물을 뚫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자유에 도달한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니, 마침내 내 귀에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 강을 건넜지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 자제한 경지였다.”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일상의 그곳이 예전과 다르게 여겨진다면 성공이다. 나의 시선이, 나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하지만 길 위에서 마주한 새로운 것과 낯선 풍경이 선사해준 변화를 추동하던 에너지는 곧 사라진다. 그러니 길에서 길을 찾으며 만난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아가야 할 길이 결국 내안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압축된 자아 성숙의 과정이 바로 여행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성과 자신을 출렁이게 하는 경이의 감동과 경쾌한 변화를 즐기는 리듬감으로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듯 일상이라는 여행길에 올라선다. 일상 또한 이런 태도로 임한다면 연암의 탁월한 시선과 사유를 흉내 내는데 그치지 않고, 내 것으로 훔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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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길 위에서 길을 찾다박지원_열하일기 _이선영.pdf (97.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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