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2기]忠(징비록-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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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서애 류성룡 _ “忠”
송선형
왜란이 끝난 후 명나라는 1618년부터 1644년간 후금(청나라)과 오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정작 명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이자성 이란 자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런 쇠퇴의 길을 걸을 무렵 명나라 지역의 기온과 강수는 극도로 한랭하고 극도로 건조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재위 동안엔 추위와 가뭄, 기근에 메뚜기 떼의 습격, 지진의 발생, 전염병, 모래 폭풍이 있었고 마지막 해인 1643년 9월 26일엔 산서성 동남부 밤하늘에 ‘대단히 빛나는 정체불명의 피조물’이 나타나 온갖 집을 환히 비추었다고 한다. 류성룡 님도 「녹후 잡기」 편에서 이러한 왜란 전 조선에 있었던 전조증상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람은 ‘하늘이 현저하게 인간에게 계시’한 것을 주의하지 못하고 지나가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일어났어야 할 일과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을 그 누가 판별할 수 있을까? 그저 수많은 인과가 흩어졌다 모여지는 과정 속 일어나는 현상들일 뿐이다. 그러니 그 풍파 속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흐름을 읽고 매 순간 마음의 중심을 잡아내야 한다. 징비록을 읽으며 그 마음을 다지는 것이 바로 ‘충 忠’이며 그 한자 모습 자체에서 그 의미를 새겨보았다.
징비록을 읽던 중 본문만큼 길었던 주석에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놀라움으로 변해버렸다. 왜냐하면 책에 있던 대부분의 주석이 거의 인물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석들은 훗날 역자 분이 해당 인물에 관해 자료를 찾아 종합하고 정리하여 설명을 덧붙였을 테지만, 정작 저자는 많은 이름과 행적을 일일이 그리고 낱낱이 기억하며 서술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 왜란이 서애 류성룡 님에겐 얼마나 가혹했던 것이었을지 헤아려 보게 되었다. 물론 워낙 중책을 맡고 있어 소지하고 있던 당시의 문서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의 스승도 ‘하늘이 낸 인물’이라는 표현까지 아끼지 않았듯 유난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 속에서 매순간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궁리하는 통에 온몸에 그 기록들이 각인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하였다. 또 그 글을 써내려 갈 결심으로 얼마나 자신을 괴롭게 하였을까. 그의 한탄과 비통함 애통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토록 책임을 지고자 하였으며 무엇이 이토록 뒤를 돌아보게 하였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430년 전 선조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무리수였을지 모르지만 확실하게 그가 파천하는 속도가 급격히 일어난 전쟁에서 되레 시간을 벌 게 해 주었고, 덕분에 적군이 바라던 단시간에 왕을 잡고 속전속결의 승리할 계획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 상황은 요행 속에서 얻은 것이지 선조의 지혜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류성룡 님은 비겁한 왕의 모습을 면전에 두고도 오히려 충심을 잃지 않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현명히 대처하고, 일어난 사태를 수습하는 일에 집중하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매번 두려움에 빠져있는 왕과 다른 대신들의 어찌하지 못하는 망설임 속을 뚫고 나와 지략을 짜내고 사람 간의 얽혀있는 복잡한 갈등을 푸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풍전등화의 조국 앞에서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명군에게 눈물을 흘리며 거듭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렇게 대내외의 실질적 외교를 담당하며 다른 장수들과 다를 바 없는 치열한 전쟁을 고독한 마음으로 치르고 있었다. 그저 그에게 허용되었던 무기인 ‘직시와 경청, 소통’을 가지고서 말이다. 또한 그 와중에 전세에 필요한 무기와 병법과 성의 구조 등을 배우고 상황에 맞는 이들에게 사용하길 권하며 나라가 구원되길 간절히 바랐다. 또한 전란으로 피폐해진 먹을 것도 없어 굶어 죽어가는 백성을 살피기도 하였는데 거의 산송장이 되어버린 백성을 보며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라며 탄식하며 울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마다하지 않고 했던 고생은 당파 세력에 의해 오히려 전쟁을 위기에 내몬 전적이란 상소에 올라 탄핵을 받게 한다. 선조 또한 반대하지 않아 그의 업적은 당시 논공 대상에도 거론하지 않고 그를 파직시켜 버린다. 왜란 종식 후 논공행상 중에 선조는 최고의 공로를 명군에게 돌렸고 자신을 수행한 호송 공신은 86명이나 채택했으면서 전장에서 공이 있는 선무 공신은 18명 정도밖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는 끝끝내 자기 뜻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뒤에 숨어 스스로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큰 힘을 가진 명에게 충복하여 한나라의 왕으로서 자국의 충신을 구분하지 못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더욱 드러냈다.
그렇다면 자신 말고 의지할 것이 없었던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어떠했을까? 그는 무너지는 나라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 노력하다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자 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도포 위에 어떤 말을 남겼는데 그 중 ‘無傷百姓一人 무상백성일인 (백성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말라)_『명사 明史』 「장렬제기 莊烈帝紀」’ 은 그가 끝까지 품었던 뜻이라 비록 망국의 황제였지만 그 후에도 민중들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선조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가득했더라면 본인의 내면을 갉아 먹은 그 의심과 비굴함 속에서 보다 자유로울 의지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_손자병법 시계편(始計篇)
<전쟁이란 국가의 큰일이며 죽음과 삶의 바탕이고 존속과 멸망의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류성룡 님과 이순신 장군은 왜란에 맞선 지극한 ‘충신 忠臣’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것들을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극복하며 나라에 기적같은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또한 결코 이유 없는 싸움을 하지 않아 불필요한 희생을 낭비하지 않았다. 징비록을 필두로 하여 임진왜란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다 솟아나는 존경심에 여러 번 눈물을 쏟기도 하였다. 그들은 백성을 생각하며 목을 매는 왕보다 더 실질적인 선택을 했으며 도망치는 왕을 지키고 흩어지는 백성들도 다시 나라의 품으로 끌고 들어왔다.
어떤 것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일까?
오래 고심해본 결과 그것은 아마도 바로 ‘충 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충성심’이라기보단 ‘공변됨’ 즉 중심을 잡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에 더 의미를 두었다. 즉 한자의 모습 그대로 ‘마음 心’ 위에 ‘가운데 中’ 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음에 중심을 잡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상대를 올곧게 바라볼 줄 알며 세상의 흐름을 읽고 그 속에서 자기 소임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정신 그것이 바로 ‘충 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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