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2기] 知彼知己면 百戰不殆-(懲毖錄-柳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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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彼知己면 百戰不殆
새문장 2기 김현식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조잡한 무인 드론이 러시아 최신의 첨단 전차를 폭발시키는 것에 세상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전시에 드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드론은 공격 무기 역할도 하지만 사실 정보를 수집하는 정찰의 역할이 더 큽니다. 적의 주요 지휘관이나 부대 위치 등의 정보를 파악해서 각종 미사일이나 전투기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합니다. 레이다에 잡히지 않은 드론은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서 전쟁의 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현대 정보전의 핵심입니다. 정보전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정보를 수집, 분석, 전달하여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는 활동을 의미하고, 정보의 유무가 전쟁의 승패에 직결됩니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역사의 통절한 실패를 후손들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책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군무를 총괄하던 임시 벼슬인 도체찰사로서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에 대한 소중한 기록과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특히,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조선에 대한 철저한 정보를 가졌던 일본은 물병을 쏟아 놓은 듯 큰 저항 없이 7년간 조선을 짓밟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 정세에 어두웠고 일본의 역량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당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너무나도 몰랐던 조선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의 일본에 대한 정보 수집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조선 초기만 해도 조선통신사 파견 횟수가 60회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에서 선조 시기에는 단 5회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초기에 비해 급격히 줄어든 조선통신사 파견으로 일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 1950년에 다녀온 통신사의 정보도 일본군의 침략 움직임과 침략 규모를 예상하기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보도 개인적인 감상이나 평가에 머물렀습니다. 심지어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정반대의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일본이 쳐들어올 정세를 보지 못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런 엇갈리는 정보 탓에 일본과의 전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조선은 제대로 전쟁 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당시 최신 무기였던 조총을 가진 일본군의 위력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습니다. 또한, 조선은 건국 이후 오랫동안 대규모 전란을 겪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조선 군대는 전쟁할 능력도 자세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군사 행정과 장수를 선발하는 기준, 군사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반면,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군은 조선군을 압도했습니다. 그나마 류성룡이 정읍 현감 이순신 장군을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추천한 것이 조선이 멸망에 이르지 않았던 신의 한 수였습니다. 호전적인 일본을 꿰뚫어 보고 교린으로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 신숙주는 임종을 맞이하면서 “부디 일본과의 우호를 잃지 마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잊고 일본을 얕잡아 보았던 조선은 씻을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조선을 자기 손바닥 보듯 한 일본
이에 반해 일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하고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을 살펴본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역관에게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이미 기강이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말했습니다. 이어 일본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는 노력에 조선이 협력하지 않으면 일본과 조선 양국은 장차 우호를 잃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비밀리에 조선의 군사적, 정치적 정보를 수집했고,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것임을 파악했습니다. 결국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지나 명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라거나 “중국에 조공을 할 수 있도록 조선이 길을 열어달라” 등 명나라에 사대하고 있던 조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면서 전쟁의 명분을 쌓아 갔습니다. 일본의 모든 요구 사항을 거부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많은 배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적 야욕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20년 만에 전국을 통일하여 내전을 종식하고 중국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자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쇼군이 될 수 없는 것을 대륙 진출의 공을 세워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둘째는 평화 시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부 무사 계급의 불만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은 전리품을 챙기느라 혈안이 되었고 수많은 조선인을 노예로 일본에 끌고 갔습니다. 셋째는 일본은 조선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중개무역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중국과의 교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전쟁에서 정보는 승패에 직결
정보는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정찰병과 척후병들이 조선군과 명나라군, 일본군의 이동과 위치, 병력 규모 등을 수집했습니다. 수집된 정보는 전투의 기획과 실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고, 주변 해역에 해박했기에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보는 때로는 왜곡되거나 조작될 수 있었습니다. 정보의 부재나 부정확한 정보로 인해 전략적 오류가 초래되었고, 때로는 패배와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의 함대가 추가로 도착할 것이니 조선군은 그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도원수 권율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들은 거짓 정보를 진실로 믿었고, 조선 수군을 몰아붙여 칠천량에서 괴멸적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은 승리하고 한 번은 패배한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른다면 매번 위태로워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반성하고 경계하고자 류성룡은 징비록을 써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 중에 겪은 일들이 이후에도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후손들은 또다시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새로 일어나고 있는 청나라를 무시하고 격변하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에 소홀히 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여 년 만에 병자호란의 비극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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