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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한 반성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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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재윤
    댓글 댓글 1건   조회Hit 6,950회   작성일Date 21-04-18 22:45

    본문

    < 무너진 조선 >

      임진년 4월 13일. 부산포 앞바다에 수백 척의 왜군 함대가 출현했다. 왜군은 불과 이틀 만에 부산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방비가 소홀했던 조선의 군대는 기세 등등한 왜군을 대적하지 못했다. 겁먹은 군사들은 장졸을 가리지 않고 우왕좌왕 달아나기 바빴다. "왜군은 길을 나누어 멈추지 않고 우리 군대를 추격하며 여러 고을을 연달아 함락시켰는데, 한 사람도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4월 17일, 다급해진 조정은 대응책을 강구했다. 최선책은 북방의 명장 이일을 전선에 급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휘, 군사체계 어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이일은 한양의 정예 군사 300명을 데리고 가고자 하였으나 병조의 군사 선발 목록을 받아보니 모두 훈련받을 적이 없는 시정잡배, 서리, 유생이 태반이었다. 이들은 모두 징병을 면제해달라고 하소연하며 뜰을 가득 메워 전쟁터에 보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일이 명을 받은 지 사흘이 지나도록 출발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일을 먼저 내려보내고 별장 유옥에게 군사들을 이끌고 뒤따라가게 했다." 오합지졸 조선의 군대는 정예부대로 철저히 준비된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일과 신립이라는 조선 최고의 장수를 투입했으나 그들 또한 빈약한 전투력과 전략의 부재로 상주와 충주에서 연이어 참패했다. 결국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백성과 도읍을 버리고 왜군을 피해 북쪽으로 파천하였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보름여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한양은 함락됐고 버려진 백성들은 약탈과 도륙의 아비규환 속에 절망했다. 건국 200년의 건재했던 한 나라가 불과 며칠 만에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조선은 어째서 이토록 허술했을까? 무엇이 조선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었을까?



    < 자만심(自慢心)과 자비심(自卑心)의 종속적 주체 >

      조선은 명이라는 대국으로부터 자신의 존립을 유지하기 위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大)를 표방했다. 사대는 소국이 대국으로부터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 현실 논리다. 조선의 입장에서 사대는 명나라와의 조공과 책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국을 상대로 스스로를 낮출 수밖에 없는 자비심(自卑心)이 전제되어 있기에 국가의 운영주체는 종속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 사대를 표방한 이상 조선은 필연적으로 종속적 주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선왕조는 명나라와의 긴장을 유지하며 종속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식보다는 왕권의 존립을 위해 사대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비심(自卑心)으로부터의 종속이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강화하는 것이 아닌 강자를 향한 맹목적인 추종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 이것이 삼국, 고려시대의 근간을 이뤘던 상무(尙武) 정신이 조선시대에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 편 개국 후 200년 동안 조선은 평화의 시대였다. 세종에 이르러 정치가 안정되며 모든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룬다. 명나라와의 사대를 유지하며 외교적으로도 안정된 시기를 보낸다. 간혹 국경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진과 왜국은 교린이라는 회유책을 통해 안정을 꾀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를 등에 업은 200년 간의 평화와 큰 위협이 없었던 주변 정세는 조선을 안온함에 빠지게 한다. 안온함은 곧 자만심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자만은 그들의 시야를 매우 협소하게 했다. 시선은 오직 명나라를 향해 있으며 여진과 왜국은 그저 변방의 오랑캐일 뿐이었다. 조선 초기 왜구를 통제하기 위해 통신사를 적극적으로 파견했던 조선은 어느덧 왜국과의 외교를 거의 단절하다시피 한다. 성종(1479년) 이후 선조(1590년) 황윤길, 김성일이 파견되기 전까지 무려 110여 년간 통신사의 왕래를 중단한 것이다. 그 사이 왜국은 전국 통일의 정치적 안정을 배경으로 서양문물을 흡수하며 급격한 발전을 이룬다. 110여 년의 단절된 시간 동안 조선을 집어삼킬만한 국력이 길러지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뒤늦게 수상한 낌새를 느낀 조정은 통신사를 파견한다. 하지만 그마저 국제정세에 무지했기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을 가져온다. 종속의 대상을 추종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종속적 주체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이는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면 불편함을 회피하거나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종속의 대상을 향한 좁고 깊은 맹목이 생존의 예민함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이미 왜국의 침입을 감지할 수 있는 여러 조짐들이 있었지만 선조는 우물쭈물하며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대의 울타리에 안주하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던 선조의 무사안일은 나라의 운명을 풍전등화로 놓이게 했다. 종속적 주체의 전제인 자비심은 우리를 스스로 무력하게 했고, 종속적 주체가 낳은 자만심은 우리를 일본의 정세에 어둡게 했다. 이것이 조선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이유다.



    < 이순신의 철저한 방비 >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 4월 12일. 그 누구도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왜의 침략을 방비하는 자가 없을 때 이순신의 부대는 새롭게 건조된 거북선에서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포사격 훈련을 완료한다. 모두가 무사안일에 빠져있을 때 이순신의 존재는 파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운명을 구원하는 기적이었다. 조선군은 육상에서 연패를 거듭한다. 왜군은 한양에 무혈입성 후 두 달여 만에 평양성을 함락하여 의주로 도망친 선조의 턱밑까지 쫓아온다. 한 편 해상은 육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순신의 부대는 개전 이후 임진년 동안 총 11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다. 해상을 장악당한 왜군은 전쟁의 가장 핵심인 보급이 차단됐기에 평양성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 왜군은 평양성을 6월 초여름에 함락했지만, 예상치 못한 보급 차단과 북방의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평양성에 고립되어 해를 넘기게 된다. 이는 임진년 이듬해 명나라가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후에도 이순신은 연전연승하며 조선이 기사회생하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선조의 아둔함으로 백의종군의 치욕을 겪은 이순신은 통탄스러운 작금의 상황에서도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 원균의 패전으로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못한 최악의 조건에서 또다시 왜군을 격파한다. 이순신은 왜란을 종결짓는 노량해전까지 총 23전의 전투에서 23승을 거둔다. 이순신은 어떻게 이토록 철저할 수 있었는가? 이순신은 어떻게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었는가?



    < 소명의식의 능동적 주체 >

      소명의식이란 자신에게 부여되거나, 스스로 부여한 어떤 사명을 꼭 이루고자 하는 의지이다. 무관으로서 자신의 한 몸 바쳐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 이것이 이순신의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소명의식은 보통의 인간을 큰 성취가 가능한 인간으로 끌어올린다. 무관으로서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진 자가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본래 북방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백의종군 후 충남 아산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 발발 불과 1년 전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영에 부임하게 된다. 오로지 육전의 경험만 있었던 이순신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해상의 임무는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때마침 조정에서는 어이없게도 수군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하지만 왜침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이순신은 자신의 소명대로 서둘러 방비를 시작한다. 철저한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존재는 능동적 주체로 올라선다. 능동적 주체는 주변을 탓하지 않으며 핑곗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철저한 소명의식으로부터 발생된 의지가 주어진 환경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불과 1년여 만에 오합지졸 군대를 탈바꿈시켜 거북선을 건조하고 각종 무기와 전술전략을 완비하는 성과를 올린다. 앞서 말했듯이 이순신은 아주 우연하게도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전력을 완비했다. 조선 왕조를 비롯하여 모두가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 오직 이순신만이 책임 있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상을 지키는 전라좌수영으로서의 소명의식. 이것이 조선을 구한 이순신의 철저함의 원동력이었다.

      연전연승을 거두는 이순신. 그의 승리 비법은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오직 승산 있는 싸움만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치밀한 전략은 아둔한 왕에 의해 독이 되어 돌아왔다. 정유재란 발발 후 다급해진 선조는 왜군의 거점을 선재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이순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왜군의 교란작전을 선조가 물어버린 것이었다. 이순신은 승산 없는 전투임을 인지하고 명령에 불복한다. 절대적인 선조의 명령에도 전장에서 신념을 굳건히 하여 불복한 것이다. 능동적 주체는 내가 입법자가 되어 내가 내 행위의 기준을 만드는 사람이다.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만 결정한다. 능동적 주체로서 현실을 직시하며 대의에 집중한 이순신은 선조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왜군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은 명령 불복으로 갖은 고문과 또다시 백의종군의 치욕을 당한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부임한 원균 또한 선조의 명령이 무리한 전투라는 것을 알았으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출전한다. 결과는 역시 참패였다. 반년 만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의 눈앞은 캄캄했다. 연전연승의 위용을 자랑했던 수군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가 전부인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최후의 노량해전까지 총 4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다. 투철한 소명의식은 통탄스러운 배신감으로부터 이순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 누가 그와 같은 뼈저린 배신을 당하였는데도 이전과 같은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리로 돌아와 소임을 다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신념, 용맹, 신중, 철저함으로 전쟁에 임했다. 이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은 능동적 주체로서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순신의 백전백승의 이유다.



    < 종속적 주체의 멸망 >

      강화 협상이 종결되고 왜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것을 예상한 조정은 명나라에 또다시 출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미 국경으로부터 전선을 멀리 하려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기에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명나라 경락 고양겸은 조선에 공문을 보낸다.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왜군이 마침내 한양에서 달아났고...2000여 리의 영토를 되찾게 되었다. 이때 소비된 명나라 금고의 돈은 헤아릴 수 없으며, 죽은 군사와 말도 적지 않다. 우리 조정이 속국을 대우한 은의가 이 정도이니, 황제의 망극한 은혜 도한 이미 과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데 또다시 무엇을 믿고 군대를 요청하는가?... 또 왜의 책봉과 봉공을 거절한다면 왜놈은 반드시 너희 나라에 화를 입히고 너희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스스로를 위한 계책을 속히 세우지 않는가?" 참으로 굴욕적인 비판이다. 조선은 왜의 침략 야욕과 자국의 위협을 사전에 방비하려는 명나라의 셈법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강화 협상에 당사자인 조선은 빠져 있었다. 다른 나라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긴 채, 왜군에겐 치욕과 명나라에겐 굴욕을 당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순신과 의병들의 존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조정의 현명한 지휘 아래 왜침을 잘 방비하였다면 전 국토와 백성이 유린되지 않고 우리의 힘만으로 얼마든지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란 종결 후 선조는 명을 찬탄하기에 유념이 없었다. 도읍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자신의 과오를 지우고 더 나아가 자신을 공을 높이기 위해선 자신이 애타게 구원을 요청한 명나라의 공을 높이는 것이었다. 왜란에서의 승리의 공을 논하는 논공행상에서는 참으로 허망한 결론이 내려졌다. 의주로의 피란길에 왕조를 호위했던 호성공신이, 목숨 바쳐 왜군과 맞섰던 선무공신 이순신, 권율 장군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왜군을 물리친 의병들의 공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버린 선조는 이순신과 의병들의 승전을 보며 곤궁해진 자신과 상대적 비교에 빠졌다. 이는 왜란의 종결 후 철저한 반성은커녕 선조의 책임회피와 오히려 자신의 공을 높이려는 과오를 저지르게 한다. 종속적 주체가 정치적 목적으로 내부의 공을 묵인한 채 종속의 대상에게 공을 돌림으로써 더 깊은 종속의 늪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란 후 또다시 조선의 운명을 파국으로 가져간 재조지은의 부채의식이다.

      철저한 반성이 부재된 주체는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재조지은의 부채의식에 갇힌 조선은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을 일관하다 또다시 병자호란의 굴욕을 맞는다. 왜란 후 불과 4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종속적 주체는 정세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종속의 대상만을 추종하여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명에서 청으로 종속의 대상을 강제로 옮기는 치욕을 당한다. 독립적이지 않게 형성된 종속적 풍요와 변영은 양날의 검이다. 자신보다 강한 대상에 기대어 손쉽게 안정을 얻을 수 있지만, 시련이 닥치면 주도권이 없기에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비극을 맞는다. 종속적 주체는 결국 종속의 대상과 필연적으로 운명의 궤를 같이 한다. 청나라에 복속하게 된 조선은 200여 년 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하자 그 또한 경술국치의 치욕으로 멸망에 이른다.



    < 철저한 반성의 조건 > 

      왜란의 종결 후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선조가 허망한 논공행상을 논하고 있는 반면 유성룡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란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재상으로 군무를 담당했다. 왜란을 사전에 감지하여 방어책을 세우고 이순신을 발탁하여 왜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몸소 전란을 겪으며 임금을 따라 피란길에 나섰고 온갖 굴욕을 감내하며 명나라를 전장에 참여하도록 간청하였다. 조정의 그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전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투신하였다. 이처럼 과오를 뼈저리게 겪은 의식 있는 자에게 그리고 능동적 주체에게 철저한 반성은 과오를 재현하지 않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유성룡은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선조와 유성룡은 같은 일을 겪고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과오를 논한 것이다. 무엇이 과연 이 둘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종속적 주체는 자신을 철저히 해부할 수 없다. 철저한 반성 없이도 종속의 대상이 건재하는 한 그럭저럭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과오를 저지른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고 왜곡된 반성으로 또다시 과오의 굴레로 들어갈 공산이 크다. 능동적 주체는 자신을 철저히 해부한다. 철저히 해부하지 않으면 또다시 자신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임을 알기에 샅샅이 과오를 복기한다. 때문에 철저한 반성을 통해 과오를 저지른 자신을 뛰어넘는다. 이처럼 철저한 반성은 오직 능동적 주체로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과오로부터 철저한 반성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존재의 방향이 어느 곳을 향해 있는가? 능동적 주체로 온전히 나를 향해 있는가? 종속적 주체로 내가 아닌 무언가를 향해있는가? 철저한 반추와 반성은 종속적 주체와 같은 나약한 존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뼈를 깎는 고통이자 존재를 변환시키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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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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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차남님의 댓글

    오차남 작성일 Date

    조선이 왜 안일하였는지 한번 더 생각하게 해주시는 글입니다~
    종속적 주체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자기비하와 자만심 그리고 철저한 반성의 어려움
    소명의식이 탁월한 인물의 뿌리임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깊이 있는 서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