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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의 페스트 -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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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정재윤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653회   작성일Date 21-09-22 08:32

    본문

    < 삶은 부조리다 >

    천지 불인(天地不仁)
    하늘과 땅은 어질지 못함. 곧 천지는 만물을 생성화육(生成化育) 함에 있어 어진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행할 뿐이다.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5장 >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다. 자연은 정해진 마음이 없다. 선후(先後), 시비(是非), 호오(好惡)와 같은 인위적인 기준 없이 나름의 법칙으로 스스로 그러하게 생성화육(生成化育) 한다. 생성화육하는 천지는 우연 또는 필연으로 인간 문명과 마주치며 무수한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페스트와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 또한 마찬가지다. 문명의 위협이 되는 바이러스의 출현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리듯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죽음, 이별, 단절, 소외, 공포, 곤궁, 번민으로 몸부림친다. 이처럼 삶은 불합리, 불가해, 온갖 모순이 상존하는 부조리(不條理)의 총제다. 부조리는 곧 인간의 숙명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천지로부터의 숙명적 부조리에 더하여, 인간 스스로가 부조리를 생기(生起)한다는 것이다. 소설 페스트에서는 느닷없이 발생한 끔찍한 전염병이라는 부조리한 상황과 더불어 그 안에 드러나는 인간들의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페스트의 공포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통해 이득을 얻고 또한 페스트의 지속을 염원한다. 페스트는 결국 신의 뜻이며 하늘이 내리는 벌이라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의 노력은, 비과학적인 태도로 정작 페스트를 더욱 확산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될 뿐이다. 특정한 맹목과 신념으로 무장된 인간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그들과 그 주변까지 전염병의 공포로 물들게 하며 공포에 이용당하게 한다. 편협된 맹목과 신념이 스스로 전염병의 확대를 촉발하는 요소가 되듯이, 인간의 존재형식 또한 부조리함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문명의 끝없는 부조리 속에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페스트와 코로나가 뒤덮은 디스토피아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부조리에 직면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카뮈의 페스트에서 삶의 부조리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목도한다. 그것은 코로나19와 맞서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 부조리에 맞서는 덕목 >


    지성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176~177쪽 >


    페스트의 부조리에 맞서는 이들을 보며 서술자는 말한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무지의 악덕"이라고. 그리고 무지로부터 벗어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라는 지성의 덕목을 말한다. 삶에서 어떠한 부조리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사건의 인과를 통해 상황을 인식한다. 그리고 기존의 관념, 신념, 습관, 지식을 동원해 대응을 강구한다. 문제는 어떤 이들은 무지와 맹목으로 인해 왜곡된 상황인식과 판단으로 부조리를 더욱 촉발하거나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서술자의 표현으로 이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부류이다. 극단적인 신념과 맹목을 오히려 선민의식으로 착각하는 부류의 근간에는, 편협된 지식 또는 무지에 의한 배타적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무지는 그야말로 뿌리 깊다. 전에 없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어도 자신의 노선을 반추하고 점검하고 전향하고 수정하기보다는 자신의 맹목에 사실을 알맞게 끼워 맞추는 판타지를 자행한다. 결국 부조리를 편협된 신념, 맹목, 비과학으로 대응하여 또 다른 부조리를 낳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부조리에 대응하는 책임 있는 자들은, 무지로부터 촉발되는 또 다른 부조리와 맞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처럼 맹목과 무지로 무장된 인간은 자신의 뜻과는 별개로 파멸과 혼돈의 매개체로 등장하여 사회를 갈등 속으로 몰아넣는다. 페스트와 코로나와 같은 인류의 목숨을 담보하는 거대한 부조리 앞에 지성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지적인 사고에 근거한 판단과 행위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자신과 타인을 지키는 필수사항이다.


    담담함과 의연함

    대개의 경우에 맺히고 딱딱해지고 메말라 있던 감수성이 때때로 풀어져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속에 리유를 몰아넣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방비는, 그 딱딱한 상태 속에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그 매듭을 다시 한번 단단히 졸라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계속 견뎌 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환상을 많이 품지도 않았고, 또 피로 때문에 품고 있던 환상마저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간 중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이미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보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다음에 선고를 내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내라는 여자들은 그의 손목을 쥐고 울고불고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 사람 좀 살려 주세요!" 그러나 그는 살려 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그 증오심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참 인정이 없군요." 하고 누군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251쪽 >


    주인공 리유의 책무는 페스트가 의심되는 사람들을 진단하는 것이다. 매일 공포에 질린 이들을 대면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통보해야 하는 압박감이 리유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유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자신을 유지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인정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힘이 미치는데 까지 그들을 보호해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보건대 동지들과의 대화에서 환자를 대하는 그의 마음이 깃들어있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이다." 이렇듯 병마로부터 환자를 살리는 것.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지상과제였다.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누군가의 생사를 판결하는 그 잔혹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사람들의 애원을 외면해야만 했다.


    부조리와의 맞섬은 기약 없는 지난한 싸움이다. 제어할 수 없는 모순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압력과 끝을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을 버티며 견디는 것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부조리로부터의 긴장과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 오직 담담함이다. 리유가 하는 일은 병의 진단과 선고였다. 병을 고치며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책무를 냉철하게 꾸준히 해내는 것만이,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인정이었다. 담담함은 떠밀려오는 페스트의 공포와 압력으로부터 리유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페스트의 창궐이라는 기약 없는 지난한 싸움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책무를 다할 수 있었다.


    반면 부조리로부터의 긴장과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불안에 잠식당하는 경우, 인간은 두 가지의 단선적 함정에 빠진다. 희망 또는 절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은 서로를 내포한다. 절망은 희망의 좌절이며, 희망은 절망의 불씨다. 현실을 외면한 희망은 절망의 도피처이며, 절망에 매몰된 인간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 모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부조리와의 기약 없는 대립에서 희망과 절망은 모두 허상이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기대도 후회도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오직 현재에 집중하는 것. 이것만이 부조리에 맞서 나를 유지하여, 희망과 절망 어느 한쪽으로도 전도되지 않는 방법이다. 부조리에 맞서기 위한 노력, 공감, 연대, 성실에 앞서 우선 담담하고 의연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 곧 자신의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페스트의 종식과 함께 리유는 죽음의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랑하는 동지 타루를 잃는다. 사랑하는 이를 손 쓸 수 없는 끔찍한 질병에 잃는 슬픔. 그와 같은 경험은 살아남은 자를 끝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한다. 하지만 리유는 담담하게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그를 기릴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아내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접한다. 리유는 그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아내의 죽음은 몹시 가슴 아프지만, 슬픔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리유는 페스트라는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지성을 통해 길을 찾으며 담담함과 의연함으로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질병과 죽음이라는 부조리와 맞설 것이며, 예전처럼 자신의 책무를 다해 최선의 인정을 쏟을 것이다.



    < 부조리에 매몰된 자, 부조리를 경험한 자 >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는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 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앙이 계속되는 기간 중에 집단적인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또 실제로 그들은 그것이 끝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초기에 있었던 열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찾아볼 수 없는 채,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성이 비쳐 보이는 말들이었다. 처음 몇 주일 간의 그 사나운 충동이 사그라지자 낙담이 뒤따랐는데, 그 낙담을 체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시 일종의 일시적인 동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리 시민들은 보조를 맞추었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적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아직 불행과 고통의 태도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을 예리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사실 예를 들어서 의사 리유가 지적했듯이, 불행은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며, 또 절망에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238쪽 >


    페스트의 공포가 드리워진 도시에서, 리유는 발병자들의 죽음과 더불어 또 다른 불행을 야기하는 현상을 목도한다. 그것은 페스트에 의한 불행과 공포로 절망이 습관화되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절망의 습관화란 무엇일까? 무감각, 무의욕, 무관심으로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절망이 익숙해져 버린 상태. 절망을 당연히 여기는 상태. 정신이 죽어있는 상태. 마음이 상실된 상태이다. 이것이야말로 페스트라는 절망에 매몰된, 살아있는 자들의 죽어있는 모습인 것이다.


    반면 리유는 죽음의 언저리에서 행하는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서도 예민함을 잃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페스트를 주시한다. 리유는 "페스트 때문에 생기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납득하려 해서는 안 되고,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291쪽 > 리유는 부조리를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에 따른 현상들을 주시하고 통찰함으로써 부조리를 그저 지나가는 고통이 아닌 삶의 지적인 경험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부조리의 경험화는 앞으로 그와 같거나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좀 더 수월하게 또는 과거보다 더 현명한 방법으로 부조리에 맞서는 열쇠가 된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172~173쪽 >


    이전에도 리유의 삶은 그러했다. 리유와의 깊은 대화에서 삶에 통달한 듯한 그를 보며 타루는 문득 묻는다. 리유의 대답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교육과 지식이라는 지적 소양이 아닌 바로 가난이라는 한 단어다. 그것은 리유가 가난으로 주어진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겪어가며 부조리에 매몰된 것이 아닌, 부조리를 극복하여 가난을 증오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닌, 부조리를 경험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리유는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고난에 매몰되지 않고, 페스트와 같이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대상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하여, 객관화된 다양한 삶의 경험은 리유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리유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401쪽 >


    리유는 늘 그랬듯이 페스트의 종결 후 치열했던 사투의 기억을 되새기고 기록한다. 이 같은 지적이며 성실한 행위는 절망과 사투의 흔적이 깃든 페스트의 역사를 과거로 마냥 흘러 보내지 않는다. 객관화된 페스트의 경험은 리유를 더욱 성숙하게 할 것이며, 더욱 겸허하게 할 것이다. 이처럼 삶의 경험화는 자신을 괴롭혔던 고난과 절망을 고통의 기억으로 묻어두는 것이 아닌 자산으로 만들어내는 반전의 기술이다.



    < 부조리와 반항 >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 베르그송 -


    열역학 제2의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에너지는 무질서의 정도인 엔트로피(entropy)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즉 에너지의 변화를 수반하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대상은 무질서를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이처럼 자연계에서 우연 또는 필연으로 생겨난 특정한 사건은 시간이 진행될수록 점점 외부와 섞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고, 열에너지는 운동에너지로 바뀌어 간다. 결국엔 섞이고 섞여서 더 이상 섞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증가할수록 사건의 대상은 무질서가 증가하며, 엔트로피가 감소할수록 대상은 무질서가 감소한다. 물리적으로 자연계의 생명현상에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감소라는 두 개의 힘이 대립하고 있다.


    페스트와 코로나19 또한 이와 같은 물리법칙을 따른다. 페스트는 세균이며 스스로 증식할 수 있는 독자 생존이 가능한 완전한 생명체다.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곳이면 어디서나 존재한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숙주 없이는 스스로 증식할 수 없는 반생명체다. 반드시 살아있는 생물체의 세포를 숙주로 삼아야 번식이 가능하다. 어느 시점, 이러한 특성의 생명체가 탄생하였고 모든 생명체의 지상과제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무질서를 향해 뻗어 나아간다. 그리고 기생과 숙주가 필수조건인 이들이 향하는 무질서는 인간과 문명에 가닿는다.


    이에 맞서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사건에 대항한다. 문명에 그야말로 치명적인 페스트 또는 코로나19라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억제하려는 인간의 반항이 시작된 것이다. 필연적인 엔트로피의 증가를 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곧 이성이다. 이성은 감각적 인간을 개념적 인간으로, 감정적 인간을 논리적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거부할 수 없는 물리법칙에 대항한다. 그리고 혼자서는 지극히 미약한 힘을 연대(連帶)라는 집단지성을 일구어 극대화한다. 이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카뮈가 그려낸 페스트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인간의 반항은, 개개인의 지성과 용기를 바탕으로 타인과의 이해와 공감을 통한 연대로부터 시작된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미세함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인간의 방심과 오만을 파고든다. 그리고 끊임없는 증식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발휘한다. 생존의 환경이 갖추어진 곳은 어디서든 증식하여, 어김없이 전염을 일으키는 정확성과 규칙성을 띤다. 또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변이라는 유연성까지 발휘한다. 이들의 가장 큰 무기는 외부 작용으로 소멸되지 않는 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자신을 발현하는 성실함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페스트와 코로나19의 부단한 성실성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다. 세균과 바이러스라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항상 압도하는 반항의 성실함이 필수인 것이다. 사건을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성. 타인과 함께 극복해 나아가는 연대, 공감, 이해. 이러한 덕목을 부단히 실행하는 성실함. 소설 페스트를 통해 부조리에 대항하는 우리에게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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