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아픔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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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픔의 의미 >
다섯 살 꼬마 제제는 브라질 어느 가정의 육 남매 중 다섯째입니다. 제제의 집안 매우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실직 상태였으며 어머니는 아픈 몸에도 공장을 다니며 가족의 생계를 짊어졌습니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어렸기에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제의 집안은 끼니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팍팍한 삶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가족들은 다섯 살 제제의 말썽을 너그러이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제제에게는 세명의 누나와 한 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가난에 찌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집안에서 형제자매들의 존재는 제제에게 큰 억압이었습니다. 제제는 매우 영특했습니다. 누구도 제제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웃 아저씨와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어깨너머로 글을 익혔습니다. 다섯 살 또래 사내아이들이 그렇듯 제제 또한 말썽꾸러기입니다. 하지만 제제는 조금 달랐습니다. 영특한 그 머리만큼 기발한 상상력을 발동하여 장난기를 발휘했습니다. 누군가를 골탕 먹이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일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사고뭉치로 낙인찍힌 제제는 이웃들에게 온갖 욕설을 듣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욱 서글픈 건 부모님과 누나, 형에게도 매를 맞고 꾸지람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제제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제제의 집안은 이사를 했습니다. 제제는 새로운 집 마당에 있는 오렌지 나무를 발견하고 밍기뉴란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리고 밍기뉴와 대화를 나누는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제제는 밍기뉴와 친구가 되어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제제에게 오렌지 나무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제제의 호기심과 영특함은 집 밖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제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했고 자신의 마음으로 그들의 빈 곳을 채워줬습니다. 이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제제는 외로운 담임 선생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고 악보상 아저씨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집안에서는 사고뭉치 악동 취급을 받던 제제였지만 집 밖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황금 같은 마음씨를 선물하는 아이였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는 제제의 원수였습니다. 그의 자동차에서 장난을 치다 잡혀 온갖 굴욕을 당한 제제는 뽀르뚜까를 저주했습니다. 어느 날 제제는 형과 장난을 치다 발바닥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아픈 몸으로 우연히 마주친 뽀르뚜까에게서 자신을 걱정하고 돌봐주는 생각지도 못한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제제는 자신을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뽀르뚜까에게 감동했고 그와 친구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가족이 없는 뽀르뚜까는 속 깊고 영특한 제제가 사랑스러웠습니다. 둘은 영혼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뽀르뚜까 아저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제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구를 잃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아이는 비통함으로 앓아누웠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이별의 아픔은 제제를 죽음의 언저리까지 몰고 갔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은 사경을 헤매는 제제를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약이었습니다. 얼마 후 몸을 회복한 제제는 이제 더 이상 오렌지 나무 밍기뉴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와의 이별과 아픔으로 제제의 동심이 한 꺼풀 벗겨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살면서 우리가 겪는 가장 큰 마음의 고통입니다. 제제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삶이라는 현실에 눈뜨게 됩니다. 이별과 죽음을 통해 한층 성숙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아픔을 통해 성숙해지는 걸까요. 삶의 아픔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 성숙의 이유 >
당신은 이런저런 마음의 아픔을 겪으며 이전보다 성숙해진 자신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요. 물론 모든 아픔이 존재의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픔의 강도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은 아픔을 일으킨 대상 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갖게 합니다. 아픔에 잠식당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보다 성숙하게 하는 아픔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전과 관계를 열어 갑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하며,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강한 욕망을 갖게 하는 것 일수록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여 가꾸어 나아갑니다. 노력, 정성, 성실, 간절함의 덕목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투입된 에너지는 어느 순간 그만큼의 피드백을 요하는 때에 다다르거나 투입한 에너지만큼의 피드백이 사라지는 때를 맞이합니다. 도전의 결과가 결정되거나 관계의 변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결코 내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꼭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굳건한 관계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순식간에 끝나 버립니다. 자신이 쏟아부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번민합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아픔에 허덕입니다. 제제의 아픔 또한 이러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준 사람이기에 아버지로 여기고 싶어 했던 뽀르뚜까의 죽음으로 제제는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제제에게 아픔만이 남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뽀르뚜까를 만나기 전 제제는 자기혐오로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아이였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말썽만 일으키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지만 뽀르뚜까를 만난 후 제제는 점점 바뀌어 갑니다. 제제는 뽀르뚜까 아저씨의 친절과 배려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가족이 없는 뽀르뚜까는 제제를 통해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선물 받습니다. 제제는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갑니다. 자신을 병들게 했던 분노와 자기혐오는 어느새 사라지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이 꽃피웠습니다.
아픔 그 자체는 결코 존재의 성숙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관계 또는 일에 성의, 성심, 정성을 다했을 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거나 성숙해집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는 아픔은 우리에게 어떤 성숙함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노력 이상의 요행을 바라거나, 별다른 노력 없이 결과만 취하려거나, 목표와 엇나간 노력으로 발생한 아픔은 원한과 분노의 불씨입니다. 만일 나의 아픔이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면 원망은 거둬들이고 그 과정을 되새기고 반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미약한 일보의 전진이라도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체가 쏟은 노력과 정성으로 진일보하여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바라 왔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받아들여 자신을 보다 겸허하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픔을 통해 성숙해지는 성숙의 이유입니다.
< 성숙한 인간의 길 >
우리는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를수록 성숙한 인간이 되어갑니다. 한 편 어떤 이들은 혈기왕성한 청년기를 지나 중년에 접어들어도 미성숙한 상태에서 저지를 법한 인생의 실수를 되풀이하며 살아갑니다. 불가(佛家)에서 일컫는 윤회(輪廻)와 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번뇌와 업에 시달리며 인생을 허무하게 탕진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러한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는 의식 있는 인간으로 자아실현과 인격적 성숙을 이루고 사회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인간이란 어떤 인간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성숙(成熟)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현상이 충분히 발전하여 무르익은 시기에 달함 또는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 익숙해짐입니다. 성숙이란 지성, 경험, 연륜이 어우러져 어떠한 일이나, 사건, 상황, 관계를 마주함에 있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는 탁월함에 이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숙의 상태란 한 분야에서 인간이 밟아가는 단계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지성과 경험, 연륜이라는 성숙의 필수요소와 더불어 모든 성숙의 기저에는 인격적인 성숙이 전제됩니다. 기능과 기술을 통달한 성숙도. 물질과 비물질을 관통하는 성숙도. 사회적 정치적인 성숙도. 인격적인 성숙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인격적 성숙은 우리의 성숙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토대입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모든 활동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나아갑니다. 인격적인 성숙은 배품, 인내, 용기, 관용, 공감, 연민, 겸손의 덕목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합니다. 인격적인 미성숙은 모든 활동에서 주변과의 마찰을 야기합니다. 이러한 마찰은 지금 당장 나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거나 이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운명을 짓누르게 됩니다. 인격적 미성숙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협소하게 하여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미움과 냉소 더 나아가 원한과 분노를 갖게 합니다. 이로 인해 부정적으로 형성된 활동의 장은 자신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숙으로 결코 닿을 수 없게 합니다. 성숙된 인격은 윤리적 덕목으로 세상과 관계합니다. 윤리적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하려는 의지를 가집니다. 이러한 의지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노력과 경험이 합쳐지면 우리는 성숙의 단계를 체득하게 됩니다.
성숙은 외부와의 끊임없는 교섭 속에 항상적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발현되는 성숙된 노력과 경험의 산물이 외부와의 교섭을 외면한 채 고착화되면 자신이 가진 것이 절대화됩니다. 절대화로 고착된 성숙은 교만과 아집, 고집과 편협으로 언제든 탈바꿈합니다. 인간의 활동은 사회의 흐름, 즉 시대와 함께 호흡합니다. 가치, 관념, 문화, 제도는 고정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제나 요동칩니다.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못하는 경직된 성숙함은 높아진 그 위치로 변화와 새로움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전락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숙은 고착하거나 경직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숙은 더욱더 깊은 성숙의 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겸허와 겸손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숙을 유발하는 요소입니다. 새로움 또는 낯선 것으로부터 자신을 비우고 낮추게 하여 배척이 아닌 수렴으로 존재를 더 깊은 성숙으로 이끕니다. 인격적인 성숙 또한 같습니다. 인격적 성숙이란 결국 나와 다른 타인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유리한 나에게 이득만을 추구하는 관계를 취하고자 합니다. 한쪽만의 세계에 집중하는 협소함으로는 인격적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타인을 향하는 나눔, 용서, 수용, 연민은 결코 자신을 내어주어 자신이 가진 것을 축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영향력이 발현되어 세계 안에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끌어안기 위한 공감과 연민. 끊임없이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겸허와 겸손. 이는 성숙한 인간의 길을 향한 알파이며 오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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