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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 출렁이는 삶을 위하여 (그리스인 조르바_니코스 카잔차키스)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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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선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265회   작성일Date 22-08-24 23:49

    본문

    출렁이는 삶을 위하여

     

       해방과 추앙.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의 인기로 유행어가 된 이 낱말은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의 가슴팍에 꽂혔을까? 정치경제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한국 사람들이 갖는 해방을 향한 열망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것일까? 가족, 직장, 생계, 경쟁 등이 뒤엉켜 매일 마주하는 현실에서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숨 쉴 수 없는 갑갑함을 느끼며 산다면 필시 해방 욕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다른 이의 감각을 깨운다고 했다.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조르바는 우리 삶의 감각을 깨우고 생각의 선명한 지도를 그릴 퍼즐 조각을 쏟아준다. 나를 옥죄는 갑갑함에서 벗어나 한없이 자유로운 존재,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사는 출렁이는 삶을 원한다면 이 사람을 보라!

     

      # 생의 동력(에너지원)

     

    그대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므로 너희는 세계의 중심이다.

    - 박정대, ‘나 자신에 관한 조서중에서-

     

    사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길어 올린다.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임을 알기에 아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 생을 이끄는 동력이 자기 자신인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중략)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헛개비들이오. (중략)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이를 들은 두목은 이기적이라 핀잔을 주지만 내심 조르바가 부러웠을 게다. 관념의 사슬에 묶여 일종의 노예근성으로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으로 사는 사람을 불편해 한다. 이들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안전망을 깨부술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스스로 노예적 삶을 인정해야만 하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마주해야 할 위험에 놓이기 때문이다. 높이 있어 따지 못하는 포도가 신포도일거라 스스로 위로했던 이솝우화 속 여우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배고픔에 굶주리고 자신을 옭아매는 무언가에 갑갑함을 느끼며 살아갈 힘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얻으려 한다. 자기 내면과 연결되지 않은 채 충전하려고 꽂아둔 플러그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공허하고 갑갑한 이중적 느낌에 빠진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기도 한다. 반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생의 동력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순하되 단단하며 단아하다. 자기 존재의 확신과 삶의 분명한 지향점을 지녔기에 밝고 긍정적인 빛의 에너지를 뿜어 성취를 끌어당긴다. 여기 이 사람, 조르바처럼 말이다. “나는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 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그 모든 것(여자, , , 고기, )이 유쾌하게 육화하여 조르바가 된 데 탄복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 코드명: 지금 여기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중에서 -

     

       사람은 지금, 여기에 살아야 할 존재적 숙명을 지녔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인 두터운 시간의 지층을 지나오며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관념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말이 생기고 ()으로서의 시간은 분절화되고 대상화된다. 그러면서 변화라는 입체성을 지닌 시간의 동사적 특성은 점차 힘을 잃고 생동하는 생명력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명사적 성격만 남는다. 창백한 개념이 살아서 꿈틀대야 할 감각의 힘을 몽땅 빨아먹었다. 시간을 감각적으로 다룰 힘을 잃은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 과거에 묶이고 미래로 미뤄둔 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만 하는 일로 허덕이며 살아간다. 조르바는 말한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 '일하고 있네.' '잘 해보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순간을 사는 사람은 생을 충만히 즐기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행복을 누린다. 자기 자신과 현실 속의 내가 하는 일에 깊이 몰입해 있기에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는 이 순간만 사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꿈틀대는 자기 욕망의 분명한 뼈대로 선 사람은 자신을 존귀하게 대하듯 타인을 존엄함을 알고 그에 알맞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 연결이 더 강한 힘으로 삶의 성취를 이끌어 낸다.

     

      # 모순을 끌어안을 용기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

     

       현실에서 보고 느끼고 듣는 일들은 감각의 영역에서 펼쳐진다. 감각으로 입력된 것들은 하나의 정보로서 사유의 영역에서 다뤄진다. 결국 감각의 세계를 다루는 힘의 원천은 사유의 능력이다. 보이는 대로 보는 동시에 보고 싶은 것을 만들어 내며 들리는 것을 듣다가 듣고 싶은 것을 결국은 듣게 된다. 이것이 생각의 힘이다. 하지만 사유의 영역에 갇혀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거나 관념적으로 만들어놓은 생각의 틀에 갇혀 생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살고 있음을 는 조르바를 만나 깨닫는다. 복잡하게 뒤엉킨 현실위에서 사유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를 오가며 출렁이는 삶을 살고자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 조르바가 지닌 감각을 다루는 힘을 경험으로 익히고 자신의 사유의 힘을 다른 한손에 쥐고 생의 에너지원으로서 온몸에 흡수시켜 간다. 종국에는 완전한 실패를 겪지만 온전한 자유가 주는 행복 또한 만끽한다. 나 또한 왼팔에는 조르바의 영혼을 오른팔에는 두목의 그것을 장착하고 출렁출렁, 넘실넘실 역동적인 삶을 살길 원한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급변하는 상황, 원치 않는 사고 등의 현실 세계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조르바. 혼돈을 애써 쳐내 앙상하게 만들지 말고 꼬인 상태의 움직임이 만드는 혼돈의 역동적 리듬을 기꺼이 품고 살 용기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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