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적인 소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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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렸고 작가의 계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처음 제목에서의 느낀 점은 뭔가 예상되는 일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말이 다소 충격적이었는데 책의 제목은 내용의 반어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다 읽은 후에 알 수 있었다. 초반부를 읽으면서는 친구들의 우정이나 유년시절 추억이야기 쯤이라고 짐작했고, 맨부커상을 받은 문학작품들 대부분은 지루하고 한없는 비유와 은유로 점철된 재미없는 불친절한 소설 일거라고 단정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그럴듯한 문장으로 현혹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소설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스토리는 결국 틀린 예감으로 내 뒤통수를 때려 버렸고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나의 과거들을 촘촘히 상기하며 소설 속 주인공들과 점차 오버랩 되고 있었다.
토니에 의하면 에이드리언은 그 패거리 중 가장 지적이며 진지하고 준수했다. 패거리 중 유일하게 결손가정 출신이었으나 그마저도 동경의 대상이었으며(그 정도로 매력적이었겠지) 상당히 철학적이여서(그 패거리들 중 한 수 위여서) 친구들은 에이드리언과 가장 특별한 관계에 놓이고 싶어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것을 롭슨의 자살과 연결하여 의미를 굳이 부여했던 것은 후에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대한 작가의 복선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대학에 들어간 토니에게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가 생기고 베로니카의 집에 놀러 간 시점부터 이 소설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몇십년 전, 토니가 베로니카 집에 놀러갔을 때 잠깐 마주했던 베로니카의 엄마 포드부인의 죽음 뒤에 토니 앞으로 남겨진 유산과 유품(죽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에서부터 나는 작가의 계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평범하게(?) 살고 있는 토니의 노년을 뒤흔든 사건은 포드부인이 남긴 유산과 유품으로 인해 부정확한 기억을 자꾸 상기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만날 수 밖에 없었던 베로니카에게서 불충분한 문서-과거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저주를 퍼부은 편지-를 건네 받게 되면서 소설은 추리극으로 치닫게 된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오묘한 베로니카의 반응과 단서는 긴장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소설을 읽고 난 후 작가의 치밀한 계략에 허를 찔려버린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예상밖의 결말에 처음부터 책장을 다시 넘기게 되었고 포드부인과 에이드리언이 교감이 되었을 만한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분명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관계(교제)에 대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는데 임신한 여자는 베로니카의 엄마 포드 부인이었다니......가장 자극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가 치정극이 아니겠는가?
‘에이드리언이 토니 얘길 할 땐 늘 애정을 담아 말했었지. 토니가 보면 재미있을지도 몰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었다고 생각해’(p115)
포드부인과 에이드리언의 관계를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다.
죽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에는 어떤 진실들이 묻어 있었을까? 매우 궁금해진다. 그래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 꼭 토니의 손에 들어오길 바랐다. 그러면 에이드리언과 포드부인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졌을테니까.
시간(역사)에 대한 작가의 독백-작가의 뇌를 먹고 싶다.
작가는 시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토니의 독백으로 뱉어낸다. 섬세하고 통찰력 있는 문장들.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p12),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 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p95) ‘역사는 살아 남는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p101), ‘입지가 사라지고 욕망이, 이성을 끄는 매력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p105),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p34), ‘나는 대략의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p106),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시간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p107),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p141) 등등. 어느새 나는 작가에게 종속 되어버렸다. 아마도 맨부커 상을 받게 된 것 또한 이러한 문장들 때문이리라.
나의 역사는 내가 의도한 대로 조작된 것일까?
의심해 본다. 토니처럼 나의 행동이 주관적인 느낌이나 감정으로 조작되어 사실을 왜곡한 것들이 꽤나 있지 않을까? 찬찬히 나의 과거를 들여다본다. 부끄러운 기억, 이기적이었던 시간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나 나의 시간이고 나의 역사일 뿐이다. 덜 조작된 역사를 갖기 위해 다시 한번 전진할 용기를 내어본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꺽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을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을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본문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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