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왜곡된 기억, 조작된 예감 _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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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기억, 조작된 예감
평범한 토니. 불화를 싫어하는 성격이라며 소심한 태도로 산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가 흐트러질까 조심한다. 무엇이든 모양을 잡으려면 생각이 몰리는 무게중심이 생겨야 하는데 이쪽도 저쪽도 초조하니 어떤 감도 잡을 수 없다. 결국 안전한 곳은 평균 즈음이다. 치열하게 생각을 몰아가 본 적도, 어디 뾰족한 곳에 다다른 적 없이 토니는 평균치 생각을 하고 평균치 섹스를 하며 평균의 삶 정도를 버무린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밍밍한 하루, 전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엄마로부터 보내진 유산과 메모를 시작으로 과거를 대면하게 된다.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겨도 괜찮겠냐며 보내온 편지에 자신이 보냈던 답장을 읽는다. 거대한 혼란이다.
기억
토니가 기억하는 답장이 있다. 유쾌하고 너그러운 기원을 적어 보냈다. 그쯤이야 쿨했다. 기억 속의 편지는 증명할 길 없지만, 진짜 편지가 눈 앞에 확증으로 존재한다. 진짜에는 뾰족한 토니가 희번덕거린다. 악랄하고 비아냥대는, 그야말로 사나운 동물 같다. 불화를 싫어한다고? 체면, 예의 따위 아랑곳 않고 송곳 같은 말을 막 던진다. 필터링 없는 민망한 폭언이 거침없다. 기억하는 자신과 진짜 자기는 크게 다르다, 지킬과 하이드 격이다. 그가 실제 살아낸 과거인데 기억은 사실을 정반대로 왜곡했다. 기억 속의 편지는 평화로웠는데 진짜 편지는 사악하다. 잔인한 토니는 실종되고 흐리멍덩 토니가 남아있다. 기억은 왜 진짜를 몰아내는 것일까?
사건 x 감정책임
베로니카의 눈길이 에이드리언에게 머물 때 올라오던 질투심, 명석하고 지적인 그의 옆에서 팽창하던 굴욕감, 평균치 자신에 대한 분노, 자신과 맺었던 관계는 하찮다는 듯 하나가 된 둘에게 느낀 배신감. 속에서 천불이 일어난다. 자신이 휘갈겨 쓴 편지를 기억에서 지워낸 것은 베로니카나 에이드리언, 혹은 편지 때문이 아니다. 그대로 놔두면 스멀스멀 꿈틀대며 올라와 자신을 태워버릴 것 같은 감정의 힘듦 때문이다. 이런 감정이 자기 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고 이 감정들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 자기 그릇이 간장 종지 만함을 보는 것이 불편하고 그 위에 쏟아지는 감정을 분석할 의지도 용기도 없다. 여자친구 엄마의 유혹의 몸짓도 감당불가. 사람도 사건도 모두 지워버려, 내 인생에서 나가! 조용히 문드러져 가는 비누처럼 가시 같은 기억들이 서서히 저 밑으로 꺼져 내려간다.
상처
과거의 사건에는 아무 죄가 없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해프닝에 감정과 심리가 엉겨 붙어 이를 변형시켜 저장한다는 것이 문제다. 소화하지 못하고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은 울퉁불퉁 부풀어오른 상처처럼 괴물이 되어 사건의 존재를 위협한다. 심리가 존재를 위협한다. 존재가 없으면 기생할 집도 없을 거면서… 마음에서 무엇을 지운다는 것은 ‘그것’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에 반응하는 ‘나’를 멈추고 싶음이다. 에이드리언도 그렇게 죽임 당한 것 아닐까. 존재라는 집이 견고하면 심리가 이렇게 까불어 댈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존재가 심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 촉구했던 에이드리언의 말처럼... 교과서와 현실에서는 다른 감이 필요하다.
감정, 상처, 그 다음
대부분의 것들은 무엇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로 나눌 수 있다. 사건, 사실과 그 후의 반응. 감정이 있고 감정을 인식한 다음. 토니는 자기보존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자신을 보았고, 그 후 그의 반응의 문제가 남아있다. 편지를 조작했던 것처럼 이 사건 또한 조작할 것인지, 이번에는 왜곡 없이 자기보호를 할 수 있을 것인지. 평균을 찾는 대신 진실할 수 있을 것인지.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를 다루면서 자기보존이 가능하다면 그는 단단하다. 널뛰는 감정들을 차분히 어루만질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평균치 이상의 힘이 있다. 늙다리 멍청이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자기 방어를 위해 중간 즈음으로 조작된 삶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감을 잡아 엿 같은 낭비가 되지 않기를…
부디 내 예감이 틀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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