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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 도통 감을 잡지 못하는 당신에게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_줄리언 반스)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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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선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419회   작성일Date 22-07-22 00:00

    본문

    도통 감을 잡지 못하는 당신에게

     

    ’I see you‘.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이 인사를 건낼 때 하는 이 말이 심장에 콕 박혔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는 서로를 알아가며 이해하는 사이가 되고, 깊이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사이로 나아간다. 토니와 베로니카. 갓 스물이 넘은 한 쌍의 남녀가 마주 본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사이가 된 둘은 각자의 세계에서 서로를 탐색한다. 상대가 궁금하기에 자꾸만 본다. 좋아하는 음악과 책, 친구, 가족 등 자기가 있는 세계를 보여주며 서로를 알아간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생각한 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보이는 대로 본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았기에 관계의 딱딱한 껍데기만 맴돌다 끝나 버린다. 토니는 관계의 끝을 예감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끝이라 여겼고 잊었던 과거의 기억을 40년이 지난 후에야 책임의 축적으로 마주해야 했다. 자기 입장에서 편집된 기억의 흔적과 베로니카를 통해 얻은 진실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던 토니는 끝날 무렵까지도 도통 감을 잡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를! 첫사랑 베로니카와의 사랑도, 동경했던 친구 에이드리언과의 우정도, 착각의 늪에서 평화롭던 그를 거대한 혼란의 세계로 밀어낸다. 그는 과연 밀려오는 진실의 거센 파도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 관계의 감각

    앎은 아는 세계를 바탕으로 모르는 세계로 넘어가려는 발버둥이다. 모르는 세계에 그녀가 산다. 그 세계로 넘어가려 발버둥 치지 않은 토니.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왜 용기 내지 못했을까? 타인의 세계로 건너가 새로운 세계를 함께 만들 배짱, 의욕, 갈망 등이 토니에겐 없다. 자기보존 능력, 자기 보호 본능이 지나치게 강한 나와 같은 부류는 자기 틀을 깨고 관계의 깊은 곳을 향해 침투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적정선 안에 머물며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며 산다. 일도, 관계도, 성공도 평범을 추구한다. 보편을 따른다. 보이고 안정적이라고 믿을 수 있는 지점까지만 간다. ‘그랑블루의 주인공처럼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바닷속 깊이로 내려가려는 도전을 절대 하지 않는다. 모험을 시도하지 않은 채 안정적인 관계의 껍데기만 맴돌며 그 깊은 속살로 향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알 수가 없는 것을 욕망하지 않기에 관계의 깊고 향긋한 속살의 맛을 탐하지 않는다.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 섬에 가려면? 도전정신으로 무장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간절한 욕망이다. 무엇을 잃을지라도 그곳에 가고픈 자발적 의지가 있어야 한다. 나와 나 사이도 마찬가지다. 나를 궁금해하고 마주 볼 힘. 알려는 욕망이 있어야 나와 나 사이에 있는 그 섬에 갈 수 있다. 사이의 비밀을 푸는, 관계를 단단히 엮는 비결은 모르는 너 또는 나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가기 위한 간절함과 용기이다.

    하지만, 자기 보호 본능이 일어 불안과 걱정에 떨며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내 멋대로, 내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너를 본다. 판단하고 비판한다. 왜곡한다. ‘라는 세계라는 세계의 충돌. 연결을 위한 떨림과 흔들림 없이 두 세계는 아름다운 공통의 영역그 섬에 닿을 수 없다. 두 세계가 연결되어 충만한 세계로 건너갈 수 있음에도 용기 내지 않는다. 현실의 안정감에 편안히 몸을 기대고 그곳에 자신을 칭칭 매어둔다. 세상을 사는 태도도 이와 같다. 세상을 궁금해하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본다. 왜곡되고 뒤틀린다. 그 꼬임이 자기 자신을 흔들고 비튼다.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고요를 만날 수 없다. 부표를 바다 위에 띄워 놓고 그 주변만 맴돈다. 더 나아가면 더 큰 바다를 만날 수 있어도! 미지의 세계, 진실이 있는 곳으로 모험을 떠날 호기심과 용기. 탐험가의 그것을 지닌 사람은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며 궁금해한다. 에이드리언처럼! 명징하게 사유하고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행동하는 진실의 탐구자이며 실천가. 반면 토니는 어떤가? 수많은 평균치의 모습이자 곧 나의 모습이다. 관계의 중심부로 들어갈 용기가 없어 맴돌기만 하고 껍데기만 핥는다. 껍데기 속의 진짜 달콤한 맛도 못 보고 가시 박힌 단단한 껍질을 뚫고 들어갈, 껍질을 쪼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어찌해야 할까? 나와 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관계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자기 벽을 깨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솔직해질깡과 사실을 인정할 용기 그리고 로 살 욕망을 깨워야 한다.

     

    [p70] 네가 생각하는 것, 네가 느끼는 것. , 이젠 입이 다 아프네. 진심만 말하면 돼

     

    [p141] 내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들을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져버렸다. 인생에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 시간의 끝, 죽음의 감각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산다. 몸이라는 유기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아야 할 존재적 운명을 지녔다, 그렇기에 시공의 감각을 키우는 일은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고픈 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시간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한계를 받아들임은 죽음을 명징하게 사유하는 일이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 의미를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가던 토니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기억을 더듬어 젊은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 저주를 퍼부었던 청년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목도한 노년의 자신과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무관하다고 느낀다. 패배한 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으나 자기만의 착각의 성안에 살았을 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회한에 잠긴다.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에 직면한다. 거기에 축적이 있음을, 책임이 있음을 모든 것의 너머에 거대한 혼란이 있음을 알게 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헛되게 살았다는 자각의 벽을 토니는 넘을 수 있을까? 친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 사슬에 휘감긴 그가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The sense of an ending’ 제목처럼 자기 생의 끝을 예감하고 살아남은 자로서 자신의 역사를 유언처럼 남긴 것은 아닐까?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인 생의 종말로 향하려는 자의 슬픈 자기 고백이자 최종 변론서가 될 수도 있겠다.

    생의 종말 앞에서 후회의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고 자유로움과 충만한 기쁨으로 생을 끝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앞서 말했지만 죽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내가 죽는 다는 것을 기억한다. ‘Memento mori’ 시간이 흩뿌리는, 용해제로 작용하는 시간에 휘말려 그냥 흘러가지 않고 나의 속도와 방향을 내가 정해서 나아간다. 죽음의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충만한 감동이나 아름다움보다 죽음을 떠올리고 생각하면 지금 이 생의 빛나는 의미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조차 더 밝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P106]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 진지와 경박 사이, 균형감각

    영국인들이 진지해야 할 때 진지하지 않는 게 싫어, 정말 싫어.” 에이드리언이 말한다. 진실의 탐구자이며 도량 넓고 준열한 기질의 소유자인 그는 철학적으로 자명한 삶의 살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리하였다. 고통, 아픔, 슬픔의 묵직한 질감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철학자의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삶을 논리로만 지탱할 수 있을까? 이성과 논리로만 풀어갈 수 없는 무수한 모순이 생에는 한 덩어리로 뒤섞여 있다. 진지함만으로 그것을 끌어안고 살기에는 너무 힘들다. 이때 필요한 감각이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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