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뒤틀린 현대인의 초상, 세일즈맨의 죽음 (세일즈맨의 죽음 - 아서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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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현대인의 초상, 세일즈맨의 죽음
정재윤
여기, 갈 데까지 간 막장 가족이 있다. 예순이 넘은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다 정신병을 앓지만 일을 놓지 못한다. 장성한 두 아들은 변변한 직업은 고사하고 사회 구성원의 역할도 제대로 못 한다. 어머니는 서로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찬 남편과 자식들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한다. 출구 없는 막장에서 시작된 가족의 이야기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가정을 위해 죽어라 일하던 세일즈맨은 어쩌다 파멸하게 됐을까? 한때 행복했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은 어떻게 몰락했을까? 그들의 이야기는 물질, 욕망, 관계의 왜곡된 가치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신음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 불통(不通), 불행의 씨앗 >
부모와 두 형제, 이렇게 간결한 관계에도 이 가정은 도무지 소통이 안 된다. 아버지 윌리, 그는 집안의 독재자다. 독재자란 무엇인가.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주무르며, 권위에 대한 도전을 허락지 않는 존재. 하여, 독재자는 소통하지 않는다.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 지시하고 명령할 뿐. 그는 가족 모두를 무시한다. 아내 린다는 가장 만만한 상대다. 윌리는 아내가 입만 벙긋해도 끼어들지 말라, 조용히 하라는 말로 그녀의 의견을 묵살한다. 자신의 기준에 패배자인 두 아들과도 불통이다. 이런 아버지에 대해 첫째 비프는 말한다.
비프 : 왜 아버진 항상 나를 업신여기지?
해피 : 업신여기는 게 아니라.....
비프 :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버지는 비웃는 표정이라니까.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21~22쪽)
윌리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아들을 무시한다.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힘을 잃어가는 자신의 권위를 사수하기 위해 자식을 제압하려 한다. 물론 자식도 이에 반발한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니, 대화는 늘 감정싸움으로 번진다. 윌리와 두 아들의 불통 이유다. 독재는 더 강력한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밖에 없다.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종국에 분노가 극에 달한 비프. 독재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아버지를 제압한다. 월리는 안과 밖으로 처참히 무너지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한다. 자아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정신분열증을 앓는다. 밖으로 소통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은 내면을 갉아먹는다.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벤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자기를 확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결국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환각 속에 파멸을 향해 질주한다.
윌리의 가정에선 누구도 존중받지 못한다. 존중하지 않는 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본색, 치부, 한계를 낱낱이 알기 때문이다. 서로를 격하(格下)하는 마음속에 오해는 점점 깊어간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도 인정받지 못하는 고립된 인간. 외로움과 무력에 허덕인다. 소통은 서로를 인정하는 준거이며 공동체의 결속으로 귀결한다. 불통은 서로를 무시하는 준거이며 공동체의 분열로 귀결한다. 소통과 공감의 부재. 불통은 불행의 씨앗이다.
< 쾌락에 중독된 인간 >
윌리, 비프, 해피 세 부자는 모두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은 그만큼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강력한 힘은 쾌락이다. 쾌락은 강렬하지만, 지속성이 짧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갈구하며 중독에 빠진다. 삶을 긍정으로 이룰 수 없다. 쾌락에 중독된 인간의 말로는 파멸뿐이다.
세 부자는 쾌락에 심취해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윌리는 미대륙을 전전하는 세일즈맨이다. 오직 혼자서 각박한 세상을 상대하는 외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살인적인 경쟁 뒤에는 반드시 허무와 공허가 뒤따른다. 외로움과 공허를 달래기 위한 보상심리가 작동하고. 출장에서 만난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의 외도는 숨 막히는 실적 압박과, 생계의 무게를 잊게 하는 해방구다. 윌리는 외도에 중독된 인간이다.
비프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한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리더로만 대접받아온 그는, 지시받고 명령받는 일은 할 수 없는 인간이 돼버렸다. 현실에서 상황이 틀어지면 즉시 그 자리에서 도둑질한다. 무엇을 훔치냐는 중요치 않다. 도둑질을 통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짜릿한 쾌감에 중독된 것이다. 현실의 좌절을 도둑질의 쾌감으로 치환하는 비프. 그는 도벽에 중독된 인간이다.
해피도 존재감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형보다 꿈은 크지만, 자신의 현실을 외면한다. 외면하는 방법은 거짓말이다.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고.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달고 산다. 타고난 성적 매력과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능력은, 여성을 유혹하는 데 제격이다. 해피는 마음먹은 대로 여자들을 꾄다. 심지어 직장 상사의 여자를 건드린다. 트로피를 수집하듯 여자들을 정복하며 쾌락을 얻는다. 거짓으로 여성을 유혹하여 그릇된 성취감을 얻는 해피. 그는 거짓과 성에 중독된 인간이다.
윌리 : 그러니 오늘 경기장에 나가는 게 중요한 거야. 수천 명이 너를 주목하고 사랑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우리 애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 이름이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모든 문이 그 애를 향해 열릴 거라고요! 형님, 전 그걸 봤어요, 수천 번도 넘게 봤다고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03쪽)
비프 : 한번 해 보고 싶은 게 있긴 해... 내가 관둘 때 올리버가 한마디 했거든,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비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재든 찾아와."라고... 가서 한번 만나 봐야겠어. 1만 달러, 아니면 7~8000달러만 있으면 멋진 목장을 살 수 있을 거야... 목장만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뭔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27~28쪽)
해피 : 둘이서 농구 팀 둘을 만드는 거예요... 서로 경기를 하는 거죠. 100만 달러짜리 광고가 될걸요. 형제 둘이서 말이죠, 로먼 브라더스. 그리고 로열 팜스 호텔에서 전시회를 열어요. 온갖 호텔에서 말이죠. 전시장과 농구 경기장에 광고판을 붙이고. '로먼 브라더스'라고. 와, 그러면 좀 팔릴걸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73쪽)
해피 : 아버진 뭔가 기대할 게 있을 때 가장 행복하시다고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25쪽)
각자의 중독과 더불어 세 부자가 공통으로 빠져든 쾌락이 있으니. 바로 미래의 환상에 심취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계되어 실현 가능한 꿈이 아니다. 이들의 꿈은 구체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실현 불가능한 환상일 뿐이다. 환상의 쾌락은 원대한 장밋빛 미래를 즐기는 것이다. 성취의 과실에만 집중하여 자신이 누릴 환상을 그린다. 마치 성공할 것 같은 기대감에 가슴이 뛰고, 피가 돌고, 뇌세포가 깨어나는 쾌감에 젖는다. 암울한 현실을 자각할수록 더 화려한 환상을 그린다. 짧은 순간 이들을 살맛 나게 한다. 세 부자는 미래의 환상에 중독된 인간이다.
< 기본이 결여된 인간 >
윌리 : 어떤 때는 제가 애들을 잘못 가르치는 게 아닌가 두렵거든요. 형님, 애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벤 : 윌리엄, 정글로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열일곱이었어. 걸어 나왔을 때는 스물한 살이었지. 그리고 나는 부자였어!
윌리 : 부자였다고! 내가 애들에게 심어 주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기백이야! 정글로 걸어 들어가는 것! 내가 맞았어! 내가 맞았어! 맞았어!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59~60쪽)
기백이란, 굳센 기상과 진취적 정신으로 뜻을 '펼치는 기운'이다.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수련과 훈련이라는 수렴의 과정을 온전히 통과해야 한다. 인고의 시간 동안 '응축의 기운'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다. 두 기운을 순리대로 펼치면. 훈련을 통해 자신을 갖추고 세상에 나와, 당당한 기백을 품고 냉혹한 사회를 헤쳐 나아가는 것. 수렴과 발산을 적절한 때를 맞춰 행하기에 탁월함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 비프는 순리와는 정반대의 삶이다.
린다 : 이번엔 집에 계속 있을 거냐?
비프 : 모르겠어요. 좀 둘러보며 뭘 할지 봐야겠어요.
린다 : 비프, 평생을 둘러보며 살 수는 없지 않겠니?
비프 : 뭘 지그시 붙들고 있지를 못하겠어요, 어머니. 뭐든 죽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고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62쪽)
비프의 고질병은 무얼 하든 지그시 붙들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다져진 실력. 꾸준한 성실함. 긍정과 자신감. 비프는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한 덕목을 무엇하나 갖추지 못해 어디서든 밑바닥에 위치한다. 그는 높은 이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현실에 허덕인다. 윌리의 그늘에서 장밋빛 환상에 길들여져,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비프. 유일한 탈출구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단숨에 도약하는 것이다.
해피 : 아버지, 형이 빌 올리버 사장을 만나러 간대요.
윌리 : 올리버 사장? 아니 왜?
비프 : 올리버 사장은 항상 제게 장사 밑천을 대 주겠다고 했거든요. 이제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 장사 밑천을 좀 꿀까 하고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72쪽)
올리버 사장에게 사업자금을 빌리려는 비프. 구체적 계획도 없이 큰돈을 빌려 새 출발을 꿈꾼다. 자신의 실력과 경험으로 쌓은 토대가 없으니. 타인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높은 이상에 단숨에 도달하기 위해 빌리는 금액은 많을수록 좋다. 과거 자신이 농구공 한 박스를 도둑질하여 회사에서 도망 나온 사실은 외면한 채. 결국 올리버를 만난 비프. 계획은 역시 허황된 망상이었다. 올리버 사장은 말단 배송 직원이었던 비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윌리 : 비결이...... 비결이 뭐냐?
버나드 : 무슨 비결이요?
윌리 : 넌...... 넌 어떻게 한 거냐? 왜 걔는 영영 못 따라오지?
버나드 : 저야 알 수 없지요, 윌리 아저씨.
윌리 : 너는 그 애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냈지 않니. 내가 알 수 없는 게 있어. 에버트 구장 경기 이후 걔 인생은 끝나 버린 것 같아. 열일곱 살 이후로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버나드 : 어떤 것에 대해서도 훈련을 쌓지 않았어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10쪽)
버나드는 비프가 실패한 원인을 꿰뚫었다. 모든 활동의 근간인 훈련을 쌓지 않았다는 것. 비프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근원에는 윌리의 잘못된 교육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교육은 자신의 이미지를 잘 가꾸어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초점이 맞춰있었다. 결과는 타인의 욕망을 갈구하는 인간. 겉만 그럴듯한 실속 없는 인간. 속 빈 강정 같은 인간을 길러냈다.
윌리 : 버나드는 학교에서 최고 우등생 일지는 모르지만, 업계에 뛰어들면 너희가 다섯 배쯤 앞설 거다. 우리 아들 둘 다 어찌나 미끈하게 잘 빠졌는지 하느님께 감사한다니까. 업계에서는 외모가 준수하고 개인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앞서가는 법이거든. 인기가 있으면 부족할 게 없단다. 나를 봐. 나는 바이어를 보기 위해 줄을 설 필요가 없어. "윌리 로먼이 여기 왔네!" 그러면 알아서 모셔 가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37쪽)
수학 F 학점 위기에 처한 아들에게 윌리가 건넨 말이다. 윌리는 학생의 본분인 자식의 공부를 도외시했다. 학생의 기본을 망각했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기준으로 비프를 훈육했다. 인기와 호감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었다. 성실한 자세. 정밀한 훈련. 작은 성취를 쌓아 큰 성취를 이루는 원리는 가르치지 못했다. 어릴 적 내재한 습속은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 이상 벗어나지 못한다. 기본이라는 튼튼한 뿌리가 내리지 않았으니, 자신을 가로막는 냉혹한 현실을 버틸 수 없다.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존재가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도둑질하며 자포자기에 빠진다. 어디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인간. 비프는 기본이 결여된 인간이다.
< 무엇을 원하는가? >
각자의 불행에 몸부림치는 세 부자. 미망을 헤매는 삶에서 똑같이 내뱉는 말이 있다. "미래가 뭔지 난 몰라.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22쪽) 비프는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부재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지 못한다. 자신이 바라는 걸 어렴풋이 떠올리지만, 성공이라는 표상에 가로막혀 내면의 소리는 늘 무시된다. 내면의 욕망과 성공의 표상. 서로 일치하지 않는 양단의 사이를 배회하며 어떤 것에도 마음을 다하지 못한다.
"내가 뭘 위해 일하는지 모르겠어... 매달 내는 집세 좀 생각해 봐. 미친 짓이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내가 항상 바라던 일인걸. 내 아파트, 내 자동차 그리고 여자들. 그런데도 빌어먹을, 난 외롭다고."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24쪽) 해피 또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전혀 모른다. 오직 물질적 조건을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착각한다. 물건과 상품, 진심 없는 관계에서 어떠한 충만함도 느낄 수 없는 해피. 형제는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혼란에 빠져있다.
"형님,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00쪽) 평생 몸담은 직장에서 해고되고, 예순이 넘어 삶의 방향을 잃은 윌리. 생의 끝자락에서 자기 삶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참담함을 느낀다. 실패한 자신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아, 서둘러야겠다. 씨앗을 좀 구해야겠어. 씨앗을 지금 당장 구해야 해. 아무것도 심지를 않았어. 땅에 묻어 둔 게 아무것도 없어."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47쪽) 그가 늘 꿈꾸던 장밋빛 기대와 환상은 없다. 씨앗을 심고, 채소와 닭을 기르는 소박한 삶.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삶을 토한다. 윌리의 죽음 후 비프는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 "꿈이 잘못된 거죠. 완전히 완전히 잘못된 꿈이었죠... 자기 자신을 끝까지 알지 못했어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72쪽)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자신이 누군지 탐구하는 질문. 자신이 원하는 걸 발견하는 질문. 삶의 지도를 그리는 질문. 세 남자는 가장 먼저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낯선 존재다. 자신을 찾지 못한 채, 오직 외부에서 평가하는 자신에 집중했다. 세일즈맨 가장은 자신을 어루만지지 않았고, 자본의 부속품으로 철저히 이용당하다 파멸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도 각성하지 못한 형제.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말로를 겪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진실을 알아야만 해요. 아버지는 누군지, 나는 누군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59쪽) 모든 이가 자신을 찾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누군지도 모르는 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주어진 삶에 매몰되어 미망을 헤맬 것이다. 삶의 고비에서.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과 갈등에서. 새로운 시작점에서. 우리는 평생 자신을 향한 질문을 품어야 한다. 치열하게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을 확신할 것이다. 결코 비프의 절규를 내뱉지 않을 것이다. "왜 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60쪽) 원하는 존재가 되는 고귀한 삶은 자신을 어루만짐에서 피어난다.
< 사랑이란 이름의 감옥, 가족 >
린다 : 네가 집에 오면 항상 최악의 상태가 되신다.
비프 : 제가 집에 오면?
린다 : 네가 올 날이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점점 더 불안해하시고, 정작 네가 도착하면 화가 난 것처럼 너와 말다툼을 하시지. 아마도 아버지는 네게 완전히 툭 터놓지 못하는 게 있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서로 미워서 안달이냐? 왜 그런 거냐?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62쪽)
윌리 : 이 집을 떠나거든 지옥에서나 타 죽어 버려라!
비프 : 도대체 제게 뭘 바라시는 거예요?
윌리 : 기차 안이든, 산속이든, 골짜기든,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반항심으로 네 인생을 두 동강 냈다는 것을 알길 바란다.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57쪽)
비프 : 아버지는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 이제 아셔야 해! 이 집에서는 단 십 분도 진실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59쪽)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부자. 한때 존경스러운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부자는 이제 원수다. 비단 윌리의 가정뿐만 아니다. 그들 모습은 바로 우리의 뒤틀린 초상이다. 윌리 부자가 원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의 부족? 교육의 실패? 자식의 반항? 물질적 조건? 이런 요인들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치는 것일까? 서로가 부족하고, 환경이 좋지 않으면 더 아끼고 사랑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유의 본질은 서로가 부족해서 생기는 원망이 아니다. 서로가 너무나 사랑하기에 일어나는 원망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지독한 애착. 부모는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고, 자식은 부모에게 의존하는 관계. 소유와 애착은 넘치는 사랑을 투여한다. 부모의 애착은 무균실과 같다. 무균실의 인간이 현실을 맞닥뜨리면, 자신을 침해하는 모든 것이 상처가 된다. 과도한 사랑이 빚어놓은 상처투성이 인간.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는 감정의 과잉에 빠진다. 부모는 기대를 저버린 자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니 무시한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지만, 그 책임을 자식에게 돌리는 아이러니. 그렇게 부모와 자식 간은 점점 원수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서로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넌 마음을 정해야 한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너희 아버지니, 정당하게 존경심을 표시하든가, 아니면 여기 다시 오지 않든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63쪽) 출구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리. 비프를 가족의 품으로 끌어 앉히기 위해. 질문으로 포장된 최후통첩을 날린다. 부모의 애착은 집요하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해서도. 자기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식 또한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 밖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펼치지 못한 자아는 다시 부모 곁을 향한다. 세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기에 존재 이유를 가족에서 찾는다. "다시 가족이 합치는 거지. 예전의 명예와 우정을 되찾을 거고."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74쪽) 밖에서 쪼그라든 관계는 가족 안에서 밀도를 높인다. 서로에 대한 애착은 점점 집착으로 변한다. 하지만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간섭과 냉소를 오가다 서로를 탓하는 원망으로 귀결한다. 가족은 사랑이란 이름의 감옥이 된다. 끝없는 원망의 굴레에 환멸을 느낀 비프. 탈출을 선언한다. "제발 절 좀 놓아주세요, 예? 더 큰일이 나기 전에 그 거짓된 꿈을 태워 없앨 수 없나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64쪽)
윌리 : 그런데 자네는 아이에게 뭘 하라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나? 아이에게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잖나.
찰리 : 아무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내가 사는 방식이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14쪽)
훌륭하게 자란 찰리의 아들을 보며, 윌리가 던진 질문. 특별한 교육방식은 없다. 그저 아무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찰리의 교육은, 자식을 방치나 방임으로 팽개쳐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 전제된 믿음이다. 믿음은 불필요한 간섭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여, 자식은 인정과 존중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소유적 관계가 아닌, 1:1의 대등한 관계. 다른 존재로서의 온전한 인정. 믿음은 상대의 가능성을 발현하여 존재를 격상(格上)시킨다.
가족은 생명의 베이스다. 태어나서 베이스캠프를 토대로 성장하고, 때가 되면 광야로 나아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부모는 응원하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자연생태계는 부모와 자식 간에 원수가 없다. 부모에게 독립해서는 목숨을 건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향한 치열한 삶에서, 상처나 원망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를 옭아매는 애착은 그만. 각자의 삶에서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분투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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