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 3기] 기억_나는 짓는 일(가즈오 이시구로_나를 보내지마)
페이지 정보

본문
기억_나를 짓는 일
새문장 3기 이선영
오래된 여행 가방을 꺼내 정리하다, 낡은 사진 한 장이 손에 걸렸다. 여섯 살 무렵의 나, 할머니 무릎 위에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 뒤에 놓인 유리장 속 찻잔, 창밖의 햇빛까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순간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오래전 끝난 장면인데, 마치 지금도 그 빛 속에 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그 사진을 내려놓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그 장면은 나를 만든 수많은 기억 중 하나였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며 나는 그 사진 속의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이렇게, 수많은 기억의 조각으로 짜여 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소설 속 화자인 캐시 H. 역시 자신의 기억을 세밀하게 꺼내 놓는다. 장기 기증이라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아이들, 그중에서도 캐시는 간병인으로 일하며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본다. 헤일셤의 초록 들판, 토미의 서투른 웃음, 루스의 모호한 미소, 기증자들의 마지막 숨소리… 그녀는 그 모든 장면을 잊지 않는다. 아니, 단순히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캐시는 그 기억을 다시 꺼내 보고, 오늘의 감정과 내일의 불안을 덧입혀 재구성한다. 그렇게 과거를 다시 쓰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확인하고 앞으로 누구로 남을지를 스스로 선택한다. 생의 끝이 이미 결정되어 있을지라도, 그녀는 그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지어 나간다.
기억은 단순히 저장된 기록이 아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 주인을 따라 성장하고 변한다. 같은 사건도 오늘의 내가 보면 위로가 되고, 내일의 내가 보면 후회가 된다. 캐시의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도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을 창조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정체성을 ‘태어날 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시구로는 이 소설을 통해 정체성이란 ‘기억을 해석하고 배열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기억을 다루는 태도가 곧 자기 자신을 만드는 힘이 된다.
물론 운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캐시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실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은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줄타기와 같다. 한쪽 끝에는 피할 수 없는 끝, 다른 쪽 끝에는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그 사이를 걸어야 한다. 어떤 이는 두려움 쪽으로, 또 어떤 이는 사랑과 의미 쪽으로 발을 옮긴다. 캐시는 후자를 선택했다. 간병인으로서 다른 이들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자신이 떠날 때 어떤 표정과 장면을 남길지를 마음속에 그렸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오래전 인도 여행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빛나는 색과 향기에 취해 떠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과 피로가 밀려왔다. 그러나 그 여행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다른 빛을 띠게 되었다. 불쾌와 황홀, 피곤과 감탄이 뒤섞인 그 경험은 이제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이 되었다. 캐시가 죽음을 앞두고도 헤일셤의 햇살과 토미의 웃음을 되새긴 것처럼, 나 역시 인도의 거리를 떠올리며 그 안에서 나의 시선과 선택을 확인한다. 기억은 이렇게, 시간이 만든 거울이 되어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그 거울 속 풍경은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캐시의 삶에서 루스와 토미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었다. 갈등과 질투, 오해와 화해가 뒤섞인 루스와의 관계, 오랜 시간 비껴가다가 마지막에야 닿은 토미와의 사랑—이 관계들은 캐시의 기억에 빛과 그림자를 번갈아 드리운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그녀가 그 장면들을 다시 바라볼 때, 과거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관계는 이렇게 기억을 새로 쓰게 하고, 기억은 다시 정체성을 빚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한 생명체가 태어나면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한 생명체가 눈을 감으면 하나의 세계도 문이 닫힌다”고 했다. 그렇다면 닫히기 전까지 우리는 그 세계를 어떻게 채워야 할까? 『나를 보내지 마』는 그 답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캐시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주어진 조건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어떤 장면을 품고 어떤 이야기를 쓸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죽음을 수용하는 가장 인간다운 방식은, 마지막까지 기억을 재구성하며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책을 덮으며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를 이루는 기억 중 어떤 것은 남기고, 어떤 것은 지울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 언젠가 나의 세계가 닫히는 순간, 그 안이 내가 사랑하고 창조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란다. 캐시가 그랬듯이!
- 이전글[새문장 3기]나의 근원자는 어디에(가즈오 이시구로_나를 보내지마) 25.08.14
- 다음글[새문장 3기]영혼, 사랑 그리고 성장(나를 보내지 마_가즈오 이시구로) 25.08.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