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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문장 3기] 우리는 누구인가?('나를 보내지마'-가즈오 이시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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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강민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8회   작성일Date 25-08-13 12:11

    본문

    우리는 누구인가?(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를 읽고)


    1.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작가나 책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짙은 바다 같은 표지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간병자, 기증자, 헤일셤 등 낯선 언어는 이야기 맥락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웠고, 몰입이 더뎌지자 도망가고 싶은 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용케 헤일셤에 안착한 이후에는 어린 친구들의 성장기를 따라가며 집중도가 높아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듯 하면서도 공간이 주는 싸늘함과 특별함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학교, 교사, 친구, 이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 친밀감, 우월감, 자신감, 자부심 등 성장기 정서를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인간적인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기는 쉽지 않았다. 깊은 유대를 쌓아가는 공동 침실 이야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토큰 논쟁, 우월감과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비밀 경호대, 바깥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기대감에 흥분하는 판매회 등 명랑한 아이들이 풀어 놓는 헤일셤의 작고 소박한 이야기가 독특한 경험으로 환기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준비 없이 만나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은 루스나 캐시, 토미만큼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뜬금없는 단어들은 긴장감을 이어가는 중요한 장치로 느껴졌다. 특권의 무가치성, 기회의 오용, 감독관, 기증자, 아이들이 아니라 헤일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에밀리 선생님의 다짐 등 통제된 운명 속에 있는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 아이들은 특별한 존재인가? 헤일셤은 왜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책의 절반을 넘어갈 때쯤 본격화되었다.

     

    2.

    그런데 도대체 마담의 화랑이란 게 뭘까?’ 헤일셤의 성장기 아이들(종종 나는 이들이 클론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에게 예술활동은 그들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게하는 중요한 활동이었고 동시에 예술적 안목과 시선을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예술 활동은 종종 정체성을 형성하는 통로로 작용한다. 나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박수근 화백의 나무와 여인은 인쇄한 그림을 재차 확대하여 우리집 현관에 오래 걸어 두고 보았다. ‘빨래터의 여인들은 컬러로 인쇄하여 지금도 책상 유리 아래 넣어놓고 있다. 박수근 화가의 투박하면서도 거친 질감, 단조로운 색상이 주는 아련함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개인과 공동체의 영혼이 담긴 듯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화가의 그림은 내 유년의 기억과 맞닿아 있다. 화가의 그림을 보면 나는 등에 업힌 아기가 되었다가, 빨래터에서 옷을 방망이질 하는 어린 소녀가 되었다. 토미에게 미술 시간은 다소 얹짢은 시간이었다. 코끼리 그림을 그린 토미는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안타깝게도 토미가 노력하면 할수록 더 큰 비웃음이 돌아왔다. 그러나 토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코티지에서도 토미는 상상 동물을 그렸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이 없는 존재로 태어나 스스로 의미를 창조한다고 하였던가. 예술은 창의력의 산물이 아니다. 토미에게 그림 그리기는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를 상상하며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수단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이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행위였던 것이다. ‘기증하고 죽는 게 운명이라면, 왜 예술을 배워야 했을까?’ 통제된 삶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으려는 유일한 반항, 인간 존엄을 위한 포기하지 않는 투쟁, 바깥 세계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영혼을 가진 인간임을 증명하는 내면의 고백이라면 나의 과장일까. 캐시와 토미가 집행 연기를 위해 마담을 만나러 가기 전 토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져가려고 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것만큼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3.

    얼마전 언니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실제로 우리는 주워왔다고 말했다.) 고양이는 쇼핑백에 담겨진 채 주차장에 버려져 있었다. ‘해필 내 차 바퀴에 버릴 게 뭐야, 왜 내가 차 앞으로 돌지 않고 뒤로 돌았을까하며 생명을 무책임하게 내다버린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보고는 그냥 둘 수 없었던 심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렇다고 언니가 그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아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언니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지속가능한 생명활동을 추구한다. 생명이라면 응당 에너지의 순환 속에서 자신의 생명성을 지속하고 확장하려는 강한 본능을 지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는데 이제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생명을 다루는 데까지 진보하였다. 문제는 과학 기술 발전이 가져올 위험성이다. 제임스 모닝 데일의 사건은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회성 사건일 뿐일까? 효율성으로 무장한 인간의 이기심이 타인의 정서와 감정에 공감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캐시와 마담과의 대화에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을 말이야. 맞아.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인간성을 상실한 효율성은 생명의 도구화를 부추긴다. 마담에게 캐시의 모습은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애원하는’ ‘가엾은 것들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마담이나 에밀리에게 헤일셤의 아이들은 인간생명도 아니다. 그저 목적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한 실험 대상, 함께할 수 없는 존재, 열등한 존재, 도구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이기심으로 무장한 효율성은 타인의 삶을 제약하고 어둠을 키운다. 타인이 어둠 속에 머무르기를 바라며 위선적인 태도로 몰인간성을 드러낸다.

     

    4.

    캐시의 언어는 서정적이다. 더 정확히는 담백하고 담담하다. 담담하고 서정적으로 표현되는 캐시의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인간적이다. 토미와 루스와의 관계에서도 사랑과 우정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가장 친한 친구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그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그 모든 계획을 세웠다니, 필통에 대해 거짓말을 좀 했기로서니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타인을 향한 이해와 사랑에서 인간적인 면도를 보여주는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황량한 노퍽에서 토미를 상상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캐시의 모습은 비극성을 가중시킨다. 안전한 환경, 멋진 추억, 우수한 교육은 자유의지가 결박된 상태에서는 허구일 뿐, 결코 '행복한 담보물'이 될 수 없다. 4번째 기증을 선택한 토미, 간병자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클론으로서 정해진 행로를 따라가며 운명에 순응하는 이들의 태도는 일면 의아하지만, 그래서 더 아프다. 토미와 캐시의 삶이 자유의지를 결박하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회적 설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인간성을 잠식하였을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철학이 부재했을 때, 과학 기술에 대한 성찰과 윤리적 경계가 무너졌을 때의 비극이 무엇인지 구체적 상황과 담담한 어조로 보여준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성을 해치지 않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가? 아아, 어쩌면 이리도 아름답고 순수하게 폐부를 찌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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