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철학은 현실로 돌아오지만, 얼치기 철학자는 철학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관념의 세계가 진리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봄’이라는 개념이 잘 소통된다고 해서 ‘봄’이 실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봄’은 없다. 땅이 온기를 품어 느슨해지고, 얼음이 풀리고 새싹이 돋는 ‘사건’들의 묶음을 ‘봄’이라고 부를 뿐이다. ‘봄’이라는 개념에 빠지면 애석하게도 진짜 ‘봄’을 잃는다. 세계를 보는 시선이 높은 사람은 ‘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사실은 ‘봄’을 구성하는 사건들을 느낀다.그런 각각의 사건들이 진짜지 개념으로서의 ‘봄’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봄’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해야 진짜 ‘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긴다. 가변적 구체성이 진실인데, 추상적 보편성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흔히들 ‘문화’나 ‘인문’ 혹은 ‘철학’의 영역이 현실과 유리되어 좀 더 고상한 옷을 입고 초월적 세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착각이 도를 넘어 그래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국가 경영이나 일상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런 태도에서는 국가 경영이나 경제를 이야기하면 철학적이거나 예술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모두 ‘일부러’ 혹은 ‘일삼아서’ 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문화나 인문 혹은 철학은 그 자체가 현실이다.삶이거나 역사이다. 다만 ‘문화적’으로나 ‘인문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인문적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인문’을 건축하는 데 미숙한 사람이나 국가는 외부에서 이미 체계화된 ‘인문’을 수입하는 데 급급하다. 수입에 급급한 쪽은 수입품을 최고의 물건이라 광고하지 않을 수 없다. 수입품으로 시장을 지배하려 하지,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여 대체품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물건으로 채워진 시장을 갖지 못하는 민족은 항상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피지배의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다. 문제는 ‘인문’을 국가 전략이나 일상생활과 연동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렇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 또 연동해서 하나의 틀로 볼 수 있는 나라는 또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선진국이 되어 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제국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중국과 한국에서 그런 차이가 나타난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중국은 선진국을 운용해 보았을 뿐 아니라 제국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고,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다. 인간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결을 가장 근본적이고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제국의 시선은 중진국이나 선진국을 훨씬 넘어서서 전체 세계를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종합적인 시선은 ‘인문’적 내용에서 선명하게 표현된다. ‘문화’가 세계 변화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문’이 세계 변화의 결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변화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변화의 핵심적 내용이나 방향을 모르고서 역사나 문명을 주도한다? 안되는 일이다. ‘문화’의 내용이나 ‘인문’의 내용을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그것들이 그들 삶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인데, 수입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고상하고 초월적이며 순수한 보편성을 갖춘 구조물로 둔갑한다. ‘전략’이 ‘진리’화 해버리는 것이다. 한 번 주도권을 놓치면 회복하기 힘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자들은 이미 지난 것으로 치부하고 버린 ‘전략’마저도 ‘진리의 이념’으로 숭앙 하면서 ‘이념’적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 전체를 비효율로 끌고 가는 그 잘난 사람들은 ‘미학’도 ‘정치’임을 알 리가 없다. (중략) ‘인문’이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인문’이 아니다. ······ 우리는 인문 수입국이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130~133쪽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