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배신 『공부의 배신』을 쓴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어떤 주립대 분교의 교수가 자신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자 자신이 가르치는 예일대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알지만, 그것도 교수가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고 말해 준다. 똑똑한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조차도 학습해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해낸 자신만의 생각조차도 자신의 생명력에서 분출시키기보다 외부의 요구에 맞추는 훈련의 결과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외부의 요구나 간섭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스스로의 생각일 수 있다. 이것만이 창의적 결과를 보장한다. 자신의 생각도 사실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중략) 자신이 발동시킬 수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질문이다. 대답이 아니다. 대답은 있는 이론이나 지식을 먹은 후 누가 더 많이 뱉어 내는가 혹은 누가 더 원형 그대로 뱉어 내는가 결정한다. 대답하는 사람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 가는 중간역이나 통로로 존재한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서 요동치다가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상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오직 자신만의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러우며 고유한 어떤 힘이다. 결국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기 자신이다. 창의력이 화두다. 하지만 창의력도 자세히 보면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 혹은 튀어나오는 것이다. 창의력이 의도적으로 발휘하려고 해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일부터라도 맘먹고 발휘해 버리면 될 일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창의적인 국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쉽지 않다. 창의력도 사실은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발휘되는 것 혹은 튀어나오는 것이다. 어디서 튀어나오는가? 질문이 튀어나오고 창의력이 발출되고 하는 그곳은 지식이나 이론 혹은 기능이 작동되는 곳이라기보다는 궁금증과 호기심과 같이 무질서하고 원초적인 어떤 곳이다.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인 어떤 처소다. 정해진 처소도 없는 오리무중의 어떤 힘일 뿐이다. 터전 같은 것이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이 있다. 남쪽의 귤을 강 건너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되어 버린다는 뜻인데, 주로 사람에게 삶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심은 터전에 따라 탱자도 되고 귤도 된다. 지식도 어떤 사람에게는 족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와 창의의 바탕이 된다. 이 터전이 문화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인격이다. 독립적 인격의 터전은 결국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창의력이 필요하면 인격적 독립성과 자유로운 기풍을 제공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문화가 강조되는 이유다. 결국은 어떻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지하는가다.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148~151쪽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