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소개] 최진석 교수 “애국이라고 할 때의 ‘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조선일보,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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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 “애국이라고 할 때의 ‘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월간조선]
“정치인의 인문적 소양의 핵심은 신뢰,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 “모든 문제를 규제하고 법제화해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게 강해지면 그게 바로 독재”
입력 2021.08.01 05:51
망국(亡國)과 해방(解放)과 건국(建國)의 달인 8월을 맞아 최진석(崔珍晳·62)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노장(老莊)철학 분야의 석학(碩學)이자 ‘스타 철학자’인 그는 작년 12월 ‘5·18역사왜곡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시(詩) ‘나는 5·18을 왜곡한다’를 통해 이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금년 5월에는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를 펴냈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에는 과거에 발목이 잡히고 기본적인 국가 정체성(正體性)마저 흔들리면서 좀처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이 녹아 있었다.
― 100여년 전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에, 조선은 나라가 망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왔을까요.
“일본은 전국(戰國)시대 이래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항상 긴장하고 예민함을 유지하다 보니 어떤 정해진 이념(理念)을 수행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반면에 도덕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은 실질을 숭상하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실질을 숭상하려면 현실을 관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능력이 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차이가 메이지유신과 망국이라는 차이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최진석 교수는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을 구축해본 기억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나라 자체를 우리 힘으로 만들고 우리 힘으로 운영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중국의 국가 시스템 안에 편입되어 살았죠. 가장 구체적인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아닌 남의 뜻에 맞추어서 운영했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구체적인 문제, 실질을 붙잡지 못한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착각하기도 하고 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데, 해방도 우리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건국도 우리가 우리 피를 흘려서 하지 못했습니다. 6·25전쟁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독립적으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구체적인 터전인 나라를 독립적으로 세우고 독립적으로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최진석 교수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진영(陣營)에 빠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철학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진영에 빠진다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영이 정해준 이념과 주장만 확대 재생산하면 되기 때문이죠. 진영정치에서는 자기 자신이 그 진영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빛나느냐 하는 것만 의미가 있지, 자기 자신이 독립적 주체로서 빛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 “국가 관념 약화, 심각한 知的 退行”
―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일단 세계를 보는 시각이 많이 후퇴했어요. 진영의 대립과 적대감이 더 심화됐어요. 근대국가의 진화(進化) 방향은 민족에서 국가로의 이행(移行)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 관념을 약화시키고 있어요. 이건 심각한 지적 퇴행(退行)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월북(越北)해 6·25 당시 북한 정권의 요직을 지낸 김원봉(金元鳳)을 언급해서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때 ‘현충원은 살아 있는 애국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애국’이라고 할 때의 ‘국(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하고, 6·25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파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을 애국의 한 전형(典型)으로 제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헌법은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매뉴얼인데,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수호자로서 역할은 하려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 헌법을 넘어선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원수(元首)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복잡해지고 해결이 난망(難望)해집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최근 김원웅 광복회장이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참….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은 네이션 빌딩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왕 도움을 받아야 하는 초라한 형편에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소련에 의지했다면 우리는 전체주의적 억압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가난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미국에 의지했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북한의 삶보다는 대한민국의 삶이 천만 배 더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한다면, 저는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김정일보다는 이명박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다가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 친일청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국가가 없어진 지 2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는 한 사람이 살 궁리를 한다면 대체 어떠했을까요? 여기에는 친일, 반일의 문제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 자체에 대한 기억이 없고,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이 식민지가 된 지 이미 20년이나 흐른 시점이라면, 그래도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은 하지만, 솔직히 저는 그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식민지 구조 속에서나마 더 나은 직업을 찾으려 노력했을 수도 있습니다. 열다섯 나이에 철이 들어보니 식민지가 된 지 20년이나 지났다면, ‘나는 죽어도 간도특설대 장교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노력하여 흥남시청의 농업계장이라도 하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 美中 新냉전 속 한국의 선택
―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부국강병(富國强兵), 특히 강병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는 최종적으로 전쟁을 하는 집단입니다. 국가 간의 승부는 전쟁으로 이루어집니다. 깨어 있는 국가는 항상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저만의 독특한 관점이 아니라, 국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주장입니다.
국가의 목표는 단 하나, 부국강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부국이 강병을 위한 것인 만큼, 국가에는 강병이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래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병이 빠진 부국은 체력은 없이 체격만 커진 꼴과 같이 허망합니다. 이 허망함을 감추려다 보면, 정신승리법으로 겨우 버티는 아큐가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아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전쟁을 기획하고 실천해본 적이 없어요. 아직도 전쟁을 도덕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 우리나라 국민들이 미국·일본에 대해서는 그렇게 결기를 보이면서, 중국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신적 배경을 찾는다면 조선시대 500년 동안 중국을 정치적·문화적으로 숭배하고 살아온 기억 때문이겠지요. 그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 외교가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북한과 보조를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현 집권세력이 기본적으로 북한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고,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여기다 보니 한마디로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로 흐르고 있는 거죠. 집권세력의 이런 몽환적(夢幻的) 통치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아니라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 미중신냉전(美中新冷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나라를 더 가까이하고 어떤 나라를 더 경계해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살펴야 할 게 세 가지 있습니다. 영토, 역사, 문화입니다. 그 나라가 우리 영토를 존중하는가 존중하지 않는가? 우리 역사를 존중하는가 존중하지 않는가? 우리 문화를 존중하는가 존중하지 않는가?”
◇ “민주와 자유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
― 1980년대 초 대학가에서는 다양한 좌파 이념 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은 북한의 민민전(民民戰) 방송 내용을 따라간 주사파(主思派)가 대세를 장악했습니다. 이것도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아닐까요.
“생각하지 않으면 맹목적 추종만 하게 됩니다. 생각의 특징은 반성과 각성과 자각에 있습니다. 주사파는 반성과 각성과 자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 추종으로 출발했다고 봐야 합니다. 주사파를 만나봤을 때 주체사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행동을 강화하는 강령인 수령론(首領論)과 품성론(品性論)만 내세울 뿐입니다.
수령론과 품성론을 지키려면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去勢)되면 자기 내부를 비판하다가 외부의 반대이론을 맹목적으로 수입해서 추종하는 일밖에 할 수 없어요.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김일성으로 넘어가는 식이죠.”
―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부동산 문제를 포함해 매사를 규제와 법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옥죄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규제입니다. 모든 문제를 규제하고 법제화(法制化)해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게 강해지면 그게 바로 독재입니다.”
― ‘나는 5·18을 왜곡한다’로 비난도 많이 받았는데, 괜히 썼다고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5·18역사왜곡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5·18은 자유와 민주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18은 민주와 자유의 확대로만 완성됩니다. 민주와 자유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은 민주와 자유의 확대를 막는 일이고, 그것은 5·18의 완성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제가 그 시를 써서 페이스북에 올리는 데 20분밖에 안 걸렸어요. 써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도 없었고, 쓰고 나서 괜히 했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흔적은 남겨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법을 만든 사람들은 개운하고 통괘하겠지만, 이는 대한민국의 사유(思惟) 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겁니다.”
◇ “대통령이 너무 급조된다”
― 지금 대선 후보로 나선 사람 중에 우리나라를 선진국, 선도국가로 끌어올릴 만한 사람이 보입니까.
“아직은 없어요. 우리나라를 선도국가, 일류국가, 전략국가로 도약시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이 ‘시대의 급소’를 잡은 사람은 보이지 않네요.”
―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할까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든지, 대통령을 뽑는 사람이든지, 우리나라가 굉장히 커진 나라라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진국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인문적 높이의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나라나 삶을 하나의 기능적인 단계에서가 아니라 모든 기능적인 단계를 통괄(統括)하는 높이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인문적 능력’입니다.
정치인의 인문적 소양의 핵심은 신뢰,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염치(廉恥)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고, 문명이나 역사에 대한 일정 분량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굉장히 중요한 단계에 있는데, 이 정도 리더십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또 계속 ‘적폐청산’만 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이 나라는 어떤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데 대한 장기간의 인식 경험과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어떤 노력을 해왔다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너무 급조(急造)됩니다. 그저 어떤 대립적 명성과 인기로 대통령이 되려고 해요.”
― 철학자로서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보수는 국가이익을, 진보는 보편적 가치를 더 중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수는 국가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그 사람이 보수냐 아니냐를 결정합니다. 그 충성심은 국방과 납세(納稅)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보수를 자처하면서 국방과 납세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닙니다.
진보는 보편적 이념을 중시하는데, 보편적 이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인권, 평등 같은 것들입니다. 진보를 자처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진보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진보는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어요. 그것은 보수주의자가 국방과 납세에 문제가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는 투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은 투기를 못 하게 한다든지, 자기는 자식을 자사고나 외고에 보내면서 자사고나 외고를 폐지한다든지 하는 것은 진보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보수도 없고 진정한 진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내 편 네 편만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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