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소개][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월간조선,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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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애국이라고 할 때의 ‘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근대국가의 進化 방향은 민족에서 국가로의 移行… 국가 관념 약화는 심각한 知的 退行”
⊙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다”
⊙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보다는 나아…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
⊙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元首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
⊙ “철이 들어보니 식민지가 된 지 20년이나 지났다면, 노력하여 흥남시청의 농업계장이라도 하려고 했을 것”
⊙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게 돼”
⊙ “진보 자처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진보 아니다”
⊙ “정치인의 인문적 소양의 핵심은 신뢰,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최진석
1959년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중국 베이징대 박사 / 서강대 철학과 교수, 同 동아연구소장, 건명원 원장 역임 / 現 서강대 명예교수. (사)새말새몸짓 이사장 / 저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나는 누구인가》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등
⊙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다”
⊙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보다는 나아…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
⊙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元首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
⊙ “철이 들어보니 식민지가 된 지 20년이나 지났다면, 노력하여 흥남시청의 농업계장이라도 하려고 했을 것”
⊙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게 돼”
⊙ “진보 자처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진보 아니다”
⊙ “정치인의 인문적 소양의 핵심은 신뢰,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최진석
1959년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중국 베이징대 박사 / 서강대 철학과 교수, 同 동아연구소장, 건명원 원장 역임 / 現 서강대 명예교수. (사)새말새몸짓 이사장 / 저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나는 누구인가》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등
사진=조준우 |
8월은 망국(亡國)과 해방(解放)과 건국(建國)의 달이다. 2021년 8월을 맞은 마음은 편치가 않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지만, 대한민국호(號)는 갈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은 ‘대한민국은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다’ ‘이제는 내리막길만 남았다’라며 체념하고 있다. 내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여야(與野)에서 많은 후보가 출사표(出師表)를 던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황천항해(荒天航海)를 해야 할 대한민국호를 이끌 만한 믿음과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때아닌 역사 논쟁으로 다시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있다. 김원웅(金元雄) 광복회장은 지난 5월 21일 경기도교육청이 추진하는 ‘친일(親日) 잔재 청산 프로젝트’ 활동에 참여한 경기도 양주백석고 학생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1980년대 대학가 대자보(大字報)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광복회장이라는 사람이 되풀이한 것이다.
지난 7월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李在明) 경기도지사는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 달라서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세력들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은가”라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야권 대선 주자 지지율 1위인 윤석열(尹錫悅) 전 검찰총장은 7월 4일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란 황당무계 망언을 집권세력 차기 유력 대선 후보인 이 지사도 이어받았다”며 “대한민국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고 비판했다. 이재명 지사는 이에 대해 ‘색깔론’이라고 맞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최진석(崔珍晳·62)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였다. 노장(老莊)철학 분야의 석학(碩學)이자 ‘스타 철학자’였지만, 기자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12월 그가 쓴 시(詩) ‘나는 5·18을 왜곡한다’를 통해서였다. 그는 당시 이 시에서 국회를 통과한 소위 ‘5·18역사왜곡특별법’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고 나서 올해 3월에 나온 《나 홀로 읽는 도덕경》과 5월에 나온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특히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는 과거에 발목이 잡히고 기본적인 국가 정체성(正體性)마저 흔들리면서 좀처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이 녹아 있었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최진석 교수의 사무실을 찾아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고,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일본과 조선의 차이점
8월이면 우리는 늘 홍역을 한 번씩 치른다. ‘반일(反日)’과 ‘친일(親日)청산’이라는 홍역이 그것이다. 하지만 극일(克日)의 다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일본을 한 번은 이겨봐야 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다.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최소한 한 번은 정한론(征韓論)을 펼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묘를 찾아간다. 내 의지가 약해지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내 제자에게는 요시다 쇼인을 공부시켰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반가웠다. 기자 역시 같은 마음으로 일본 야마구치(山口) 하기(萩)에 있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요시다 쇼인이 세운 사설 학교)를 세 번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자 최진석 교수도 반가워했다.
메이지(明治)유신의 주도세력이었던 조슈(長州·지금의 야마구치)에는 메이린칸(明倫館)이라는 번교(藩校·번의 공립학교)가 있었다. 요시다 쇼인이 병학(兵學)교수를 지낸 메이린칸은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晉作) 등 메이지유신의 인재들을 많이 길러냈다. 《맹자(孟子)》에서 유래한 ‘명륜’이라는 이름은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조슈의 메이린칸에서는 유신의 인재들이, 조선의 명륜당에서는 망국의 선비들이 배출됐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왔을까요.
“일본은 전국(戰國)시대 이래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항상 긴장하고 예민함을 유지하다 보니 어떤 정해진 이념(理念)을 수행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반면에 도덕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은 실질을 숭상하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실질을 숭상하려면 현실을 관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능력이 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차이가 메이지유신과 망국이라는 차이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해방도, 건국도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실질을 숭상하기보다는 관념에, 명분에 빠져 사는 성향이 강한 것은 일종의 민족성으로 보아야 할까요.
“실력이죠.”
― 실력이요?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을 구축해본 기억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무슨 의미입니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나라 자체를 우리 힘으로 만들고 우리 힘으로 운영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중국의 국가 시스템 안에 편입되어 살았죠. 가장 구체적인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아닌 남의 뜻에 맞추어서 운영했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구체적인 문제, 실질을 붙잡지 못한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착각하기도 하고 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데, 해방도 우리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건국도 우리가 우리 피를 흘려서 하지 못했습니다. 6·25전쟁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독립적으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구체적인 터전인 나라를 독립적으로 세우고 독립적으로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 그렇지요.
“우리 삶의 전략이 추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을 지식(智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수입국이었어요. 지식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세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수입해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세계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해본 적이 없어요. 구체적인 세계를 우리 뜻과 의지와 욕망으로 관찰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이 만든 처방전, 이념을 가져다 쓰기만 했습니다.”
―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럽은 약소국(弱小國)에서도 세계사적인 지적(知的) 생산이 나왔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생산력이 약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1500년대 작품인데, 그때 이미 법률로 지적 재산권을 보장해주고 있었어요. 지식을 법률로 보호할 정도로 지식이 풍성했고, 그런 지식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이 복잡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식의 대부분을 나라가 독점(獨占)하고 있어서 지식이 활발하게 생산되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자유롭게 세계와 관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죠. 어느 정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네가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어 살아라’ 하는 것과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너희는 여기에서 그냥 살아라’ 하는 것은 창의성(創意性)이나 자율성(自律性)을 작동시키는 데 있어서 큰 차이가 있어요. 지금도 국가가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려는 것 같아요.”
― 그렇죠.
“국가 입장에서는 그것이 효율적인 것, 일사불란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죠. 하지만 지식의 생산이나 자율적·창의적 활동들을 못 일어나게 하는 부작용이 무척 큽니다. 조선은 생각하는 방식까지 모두 국가가 정하는 나라였는데, 이는 나라를 풍성하게 하는 데 굉장한 장애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주쿠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2년 반 동안 92명의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절반은 혁명 과정에서 죽었고, 나머지 절반은 살아남아서 메이지유신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400여 개의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있었습니다. 지금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처럼 거기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공부했어요. 그런데 400여 개에 달하는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이 요시다 쇼인이 만든 손바닥만 한 쇼카손주쿠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손바닥만 한 쇼카손주쿠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요.
“조선의 젊은이들은 배우라고 정해진 것만 배웠습니다. 쇼카손주쿠의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궁리한 다음에 그것을 공부했습니다. 쇼카손주쿠는 ‘시대의 급소(急所)’를 잡았지만, 조선은 ‘시대의 급소’를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망했다”
― 메이지유신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면, 메이지유신은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국학(國學), 난학(蘭學) 등 다양한 지적 축적(蓄積)을 바탕으로 한 ‘지식정보혁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지식의 생산은 지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구체적인 세계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구체적인 세계를 관찰하고, 그러면서 발견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 야망이 없으면 지식은 생산되지 않습니다. 이런 야망이 없는 지식인들, 혹은 세계를 자기 눈으로 관찰하려는 포부가 없는 지식인들은 이미 만들어진 지식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 조선 500년 동안의 국시(國是)였던 주자성리학은 결국 구체적 세계와 괴리되어 있던 것이 문제라는 말씀이군요.
“조선이 1392년 건국한 지 꼭 200년이 지난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습니다. 기업도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잘하다가 갑자기 망하는 법은 없어요. 자기가 먼저 망해서 힘이 빠지면 그 틈을 외적(外敵)이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 맞습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된 이후, 200년 동안 조선은 ‘누가 이것을 더 잘 지키느냐’ 하는 데만 매달렸습니다. 200년 동안 사회・경제적 조건이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맞는 이론이나 지식을 생산해야 합니다. 조선은 지식이나 이론은 그대로 정해놓고, 밑에서 변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관찰하고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이론과 실제 사회・경제 조건 사이에 격차가 생기면서 비효율(非效率)이 발생했고, 그것이 200년간 쌓인 것이죠.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스스로 망했다는 얘기입니다.”
陣營정치
―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의 《고별혁명(告別革命)》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시대가 변화할 때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이 나오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건국·근대화·민주화를 이룩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생각하려면 일단 자기 자신이 궁금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속적 상태에 빠지면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틀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그 틀을 누가 더 오랫동안 잘 수행하느냐만 중요해지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를 궁금해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최진석 교수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진영(陣營)에 빠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철학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진영에 빠진다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영이 정해준 이념과 주장만 확대 재생산하면 되기 때문이죠. 진영정치에서는 자기 자신이 그 진영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빛나느냐 하는 것만 의미가 있지, 자기 자신이 독립적 주체로서 빛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 그렇죠.
“다른 기능적 능력은 배워서 습득할 수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인격적인 문제이고, 더 나아가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각(自覺), 각성(覺醒)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에요.”
“先導국가는 ‘생각하는 국가’”
― 개인 차원의 각성은 그래도 종종 일어날 수 있지만, 한 나라를 각성시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선도(先導)국가는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하는 국가’입니다. 종속(從屬)국가나 추격(追擊)국가는 ‘생각하지 않는 국가’예요.
아주 후진적 레벨에서 출발해서 중진국 상위 레벨까지는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따라 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중진국 상위 레벨에서 선도국가 내지 전략(戰略)국가, 즉 선진국으로 올라서려면 이때부터는 사람이 생각해야 합니다.”
―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것이 가능할까요.
“역사에서 1820년을 ‘대분기(大分岐)’라고 합니다. 1760년에 시작된 산업혁명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생산력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국가·국제질서 시스템이 이때 딱 세팅(setting)됐다는 얘기입니다. 1820년대 이후로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중진국 함정’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나라가 없어요. 생각하지 않고 도달한 높이는 단단하게 유지되기 어렵고, 도약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능적·양적(量的)으로 몇 가지 면으로는 이미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생각하지 않고 이룬 업적이라면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을 어떻게 제고(提高)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철학자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큰 사명입니다.”
“국가 관념 약화, 심각한 知的 退行”
―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以上)이다’라고 말했어요. ‘지금의 상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것을 ‘건너가기’라고 표현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가르치면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하든지 탁월해질 수 있어요. 탁월해진 인간들의 수가 많아지면 그 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됩니다. 시대에 맞는 인재를 먼저 기르는 나라는 흥하고, 거기에 실패한 나라는 망하는 거예요.”
―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일단 세계를 보는 시각이 많이 후퇴했어요. 진영의 대립과 적대감이 더 심화됐어요. 근대국가의 진화(進化) 방향은 민족에서 국가로의 이행(移行)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 관념을 약화시키고 있어요. 이건 심각한 지적 퇴행(退行)입니다.”
―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대한민국이 건국된 게 1948년이냐 1919년이냐를 놓고 논란을 빚고,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 공무원들이 충성해야 할 대상이 국가인지 민족인지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한민국은 그동안 이룩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요.
“네이션 빌딩의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를 경험했고, 남북분단, 남북 간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근대국가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반공(反共)이데올로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공산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데 이 흐름을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북한과 그 동조세력이었죠. 민족 정통성을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에 두는 흐름이 생겼고, 그러면서 묘하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과 민족을 긍정하는 것이 같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 그렇습니다.
“민족감정에 빠지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로 보게 되고, 북한의 역사는 힘들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 나쁜 사람으로 평가되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운 사람들이 오히려 찬양받는 매우 부정적인 기류가 만들어졌습니다. 시민단체나 정치결사체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은 그러면 안 됩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군(軍) 통수권자이고,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고 수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을 홀대하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운 사람을 높이려 하는 일은 대통령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민족과 국가
―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월북(越北)해 6·25 당시 북한 정권의 요직을 지낸 김원봉(金元鳳)을 언급해서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때 ‘현충원은 살아 있는 애국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애국’이라고 할 때의 ‘국(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입니다.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라고도 했는데, 애국으로 통합되어야 할 보수와 진보는 중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미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닙니다. 배타적(排他的)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일 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말을 할 때, 말로는 ‘애국’이라고 하면서 느낌은 ‘민족’을 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민족적 의미에서 기려야 한다면, 민족적으로 기리면 됩니다. ‘애국의 현장’은 대한민국만을 중심에 놓고 배타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국가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하고, 6·25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파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을 애국의 한 전형(典型)으로 제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래서 대한민국이 네이션 빌딩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네이션 빌딩이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현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헌법은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매뉴얼인데,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수호자로서 역할은 하려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 헌법을 넘어선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원수(元首)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복잡해지고 해결이 난망(難望)해집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동감입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민족의 시각으로는 국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시각으로는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민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국가들과는 다 등을 돌리고, 민족이라고 상상하는 북한에만 목을 매고, 그 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만 굽실거리는 것으로는 국가의 높이에 있는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아큐(阿Q)가 되어 풀리지 않은 현실을 풀린 것으로 ‘정신 승리’ 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한국군과 북한군
― 대통령뿐 아니라 여야 정치인들, 심지어 보수정당의 정치인들도 마치 모범답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金九)를 꼽습니다.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보다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김구를 더 존경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정체성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 아닐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번째 국무회의를 백범기념관에서 했습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 등의 법통(法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자기의 피를 흘려서 국가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자기에게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각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천안함이나 연평해전 장병 등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운 사람들은 굉장히 홀대받고, 국군의날에 퍼레이드 대신 야간에 쇼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 최근 김원웅 광복회장이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참….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은 네이션 빌딩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왕 도움을 받아야 하는 초라한 형편에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소련에 의지했다면 우리는 전체주의적 억압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가난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미국에 의지했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북한의 삶보다는 대한민국의 삶이 천만 배 더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세요. 〈JSA〉를 보면 북한군 병사는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는 멋있는 사람으로 나오는 반면 한국군 병사는 결국 자살합니다.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 북한군 병사들은 질이 높고 군인으로서의 태도를 지키는데, 한국군 병사는 탈영병입니다. 〈공조〉라는 영화를 보면 한국 형사는 굉장히 천하게, 북한 경찰은 굉장히 멋있게 그려집니다.”
“내재적 접근법은 이론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것도 역시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지식인은 대부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보다 김일성을,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보다는 김정일을 높게 봅니다. 21세기에 3대 세습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계승’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한다면, 저는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김정일보다는 이명박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다가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수정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한동안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내재적(內在的) 접근법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사실 그건 이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이론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客觀性)과 보편성(普遍性)입니다. 주관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어디에나 치우침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북한을 이해할 때 북한의 내재적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대한민국을 이해할 때에도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내재적 조건을 가지고 이해해야죠. 대한민국을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민주 같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이해하고, 북한을 이해할 때에는 북한만의 특수한 조건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이론이 아닙니다. 어떤 지적 작업에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건 그냥 프로파간다죠. 지금 행세하고 있는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내재적 접근법을 가지고 북한을 이해했는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이것도 모두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중국 가보고 사회주의적 인식 벗어나”
― 지금 교수님의 말씀은 그 연배의 지적 흐름과 굉장히 다른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까.
“저는 1970년대 말부터 대학을 다니기 시작해서 대학원 과정까지 포함하면 1980년대 내내 대학에 있었습니다. 대학가가 굉장히 치열할 때였고, 제가 지금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시각들이 팽배했을 때였습니다. 저도 그 세례를 깊이 받았죠. 게다가 제 고향도 전라도고…. 그러다가 1990년에 중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을 보고, 북한 사람들을 직접 접하면서 그때까지 가졌던 사회주의적인, 혹은 북한에 대한 호의적 인식 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몸살처럼 한 달간 앓고 일어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통제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보고서도 안 벗어나더라고요.”
― 소위 철학자,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훈련을 안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안 받았어요.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게 아니라, 생각의 결과를 습득하는 훈련만 받았어요.”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자랑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최근 ‘친일청산’ 문제를 들고나온 것처럼, 이 문제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6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인화성(引火性)이 강한 정치적 무기다.
― 친일청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것을 대한민국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때 강대국끼리 벌이는 국제질서의 구조를 이겨낼 정도로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했습니다. 북한도 친일파를 완전히 척결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초대(初代) 내각에도 친일파가 많았잖아요? 남한이나 북한이나 외세의 간섭 아래 황망하게 국가를 세우면서 친일세력을 완전히 척결할 수 있는 독립적 구조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日帝시대에 태어났다면…’
― 그래도 오늘날까지도 친일파 척결을 못 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복회장도 박정희의 공화당에 ‘자발적’으로 공채시험을 봐서 들어갔고, 전두환(全斗煥)이 주인 노릇을 하던 민주정의당에서 조직국장도 지냈고, ‘토착 왜구’들이 득실댄다던 한나라당에서도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그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튼튼한 국가의 보호를 받던 사람도 생계 때문에 자발적으로 ‘토착 왜구’들 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생계가 해결되고 나자 이제는 친일 인사들의 ‘파묘(破墓)’까지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없어진 지 2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는 한 사람이 살 궁리를 한다면 대체 어떠했을까요? 여기에는 친일, 반일의 문제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 자체에 대한 기억이 없고,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이 식민지가 된 지 이미 20년이나 흐른 시점이라면, 그래도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은 하지만, 솔직히 저는 그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식민지 구조 속에서나마 더 나은 직업을 찾으려 노력했을 수도 있습니다. 열다섯 나이에 철이 들어보니 식민지가 된 지 20년이나 지났다면, ‘나는 죽어도 간도특설대 장교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노력하여 흥남시청의 농업계장이라도 하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저보다 공부도 더 잘하고 높은 자리에도 쑥쑥 올라간 광복회장도 ‘생계’ 때문에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저 같은 미물(微物)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국가의 목표는 富國强兵”
이런 상황에서 때아닌 역사 논쟁으로 다시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있다. 김원웅(金元雄) 광복회장은 지난 5월 21일 경기도교육청이 추진하는 ‘친일(親日) 잔재 청산 프로젝트’ 활동에 참여한 경기도 양주백석고 학생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1980년대 대학가 대자보(大字報)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광복회장이라는 사람이 되풀이한 것이다.
지난 7월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李在明) 경기도지사는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 달라서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세력들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은가”라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야권 대선 주자 지지율 1위인 윤석열(尹錫悅) 전 검찰총장은 7월 4일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란 황당무계 망언을 집권세력 차기 유력 대선 후보인 이 지사도 이어받았다”며 “대한민국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고 비판했다. 이재명 지사는 이에 대해 ‘색깔론’이라고 맞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최진석(崔珍晳·62)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였다. 노장(老莊)철학 분야의 석학(碩學)이자 ‘스타 철학자’였지만, 기자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12월 그가 쓴 시(詩) ‘나는 5·18을 왜곡한다’를 통해서였다. 그는 당시 이 시에서 국회를 통과한 소위 ‘5·18역사왜곡특별법’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고 나서 올해 3월에 나온 《나 홀로 읽는 도덕경》과 5월에 나온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특히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는 과거에 발목이 잡히고 기본적인 국가 정체성(正體性)마저 흔들리면서 좀처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이 녹아 있었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최진석 교수의 사무실을 찾아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고,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일본과 조선의 차이점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
〈나는 일본을 한 번은 이겨봐야 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다.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최소한 한 번은 정한론(征韓論)을 펼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묘를 찾아간다. 내 의지가 약해지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내 제자에게는 요시다 쇼인을 공부시켰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반가웠다. 기자 역시 같은 마음으로 일본 야마구치(山口) 하기(萩)에 있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요시다 쇼인이 세운 사설 학교)를 세 번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자 최진석 교수도 반가워했다.
메이지(明治)유신의 주도세력이었던 조슈(長州·지금의 야마구치)에는 메이린칸(明倫館)이라는 번교(藩校·번의 공립학교)가 있었다. 요시다 쇼인이 병학(兵學)교수를 지낸 메이린칸은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晉作) 등 메이지유신의 인재들을 많이 길러냈다. 《맹자(孟子)》에서 유래한 ‘명륜’이라는 이름은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조슈의 메이린칸에서는 유신의 인재들이, 조선의 명륜당에서는 망국의 선비들이 배출됐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왔을까요.
“일본은 전국(戰國)시대 이래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항상 긴장하고 예민함을 유지하다 보니 어떤 정해진 이념(理念)을 수행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반면에 도덕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은 실질을 숭상하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실질을 숭상하려면 현실을 관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능력이 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차이가 메이지유신과 망국이라는 차이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해방도, 건국도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다”
메이지유신의 인재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사진=배진영 |
“실력이죠.”
― 실력이요?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을 구축해본 기억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무슨 의미입니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나라 자체를 우리 힘으로 만들고 우리 힘으로 운영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중국의 국가 시스템 안에 편입되어 살았죠. 가장 구체적인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아닌 남의 뜻에 맞추어서 운영했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는 구체적인 문제, 실질을 붙잡지 못한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착각하기도 하고 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데, 해방도 우리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건국도 우리가 우리 피를 흘려서 하지 못했습니다. 6·25전쟁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독립적으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구체적인 터전인 나라를 독립적으로 세우고 독립적으로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 그렇지요.
“우리 삶의 전략이 추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을 지식(智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수입국이었어요. 지식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세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수입해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세계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해본 적이 없어요. 구체적인 세계를 우리 뜻과 의지와 욕망으로 관찰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이 만든 처방전, 이념을 가져다 쓰기만 했습니다.”
―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럽은 약소국(弱小國)에서도 세계사적인 지적(知的) 생산이 나왔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생산력이 약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1500년대 작품인데, 그때 이미 법률로 지적 재산권을 보장해주고 있었어요. 지식을 법률로 보호할 정도로 지식이 풍성했고, 그런 지식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이 복잡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식의 대부분을 나라가 독점(獨占)하고 있어서 지식이 활발하게 생산되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자유롭게 세계와 관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죠. 어느 정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네가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어 살아라’ 하는 것과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너희는 여기에서 그냥 살아라’ 하는 것은 창의성(創意性)이나 자율성(自律性)을 작동시키는 데 있어서 큰 차이가 있어요. 지금도 국가가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려는 것 같아요.”
― 그렇죠.
“국가 입장에서는 그것이 효율적인 것, 일사불란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죠. 하지만 지식의 생산이나 자율적·창의적 활동들을 못 일어나게 하는 부작용이 무척 큽니다. 조선은 생각하는 방식까지 모두 국가가 정하는 나라였는데, 이는 나라를 풍성하게 하는 데 굉장한 장애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주쿠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2년 반 동안 92명의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절반은 혁명 과정에서 죽었고, 나머지 절반은 살아남아서 메이지유신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400여 개의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있었습니다. 지금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처럼 거기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공부했어요. 그런데 400여 개에 달하는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이 요시다 쇼인이 만든 손바닥만 한 쇼카손주쿠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손바닥만 한 쇼카손주쿠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요.
“조선의 젊은이들은 배우라고 정해진 것만 배웠습니다. 쇼카손주쿠의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궁리한 다음에 그것을 공부했습니다. 쇼카손주쿠는 ‘시대의 급소(急所)’를 잡았지만, 조선은 ‘시대의 급소’를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망했다”
― 메이지유신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면, 메이지유신은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국학(國學), 난학(蘭學) 등 다양한 지적 축적(蓄積)을 바탕으로 한 ‘지식정보혁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지식의 생산은 지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구체적인 세계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구체적인 세계를 관찰하고, 그러면서 발견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 야망이 없으면 지식은 생산되지 않습니다. 이런 야망이 없는 지식인들, 혹은 세계를 자기 눈으로 관찰하려는 포부가 없는 지식인들은 이미 만들어진 지식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 조선 500년 동안의 국시(國是)였던 주자성리학은 결국 구체적 세계와 괴리되어 있던 것이 문제라는 말씀이군요.
“조선이 1392년 건국한 지 꼭 200년이 지난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습니다. 기업도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잘하다가 갑자기 망하는 법은 없어요. 자기가 먼저 망해서 힘이 빠지면 그 틈을 외적(外敵)이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 맞습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된 이후, 200년 동안 조선은 ‘누가 이것을 더 잘 지키느냐’ 하는 데만 매달렸습니다. 200년 동안 사회・경제적 조건이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맞는 이론이나 지식을 생산해야 합니다. 조선은 지식이나 이론은 그대로 정해놓고, 밑에서 변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관찰하고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이론과 실제 사회・경제 조건 사이에 격차가 생기면서 비효율(非效率)이 발생했고, 그것이 200년간 쌓인 것이죠.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스스로 망했다는 얘기입니다.”
陣營정치
―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의 《고별혁명(告別革命)》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시대가 변화할 때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이 나오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건국·근대화·민주화를 이룩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생각하려면 일단 자기 자신이 궁금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속적 상태에 빠지면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틀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그 틀을 누가 더 오랫동안 잘 수행하느냐만 중요해지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를 궁금해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최진석 교수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진영(陣營)에 빠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철학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진영에 빠진다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영이 정해준 이념과 주장만 확대 재생산하면 되기 때문이죠. 진영정치에서는 자기 자신이 그 진영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빛나느냐 하는 것만 의미가 있지, 자기 자신이 독립적 주체로서 빛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 그렇죠.
“다른 기능적 능력은 배워서 습득할 수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인격적인 문제이고, 더 나아가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각(自覺), 각성(覺醒)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에요.”
“先導국가는 ‘생각하는 국가’”
― 개인 차원의 각성은 그래도 종종 일어날 수 있지만, 한 나라를 각성시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선도(先導)국가는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하는 국가’입니다. 종속(從屬)국가나 추격(追擊)국가는 ‘생각하지 않는 국가’예요.
아주 후진적 레벨에서 출발해서 중진국 상위 레벨까지는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따라 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중진국 상위 레벨에서 선도국가 내지 전략(戰略)국가, 즉 선진국으로 올라서려면 이때부터는 사람이 생각해야 합니다.”
―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것이 가능할까요.
“역사에서 1820년을 ‘대분기(大分岐)’라고 합니다. 1760년에 시작된 산업혁명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생산력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국가·국제질서 시스템이 이때 딱 세팅(setting)됐다는 얘기입니다. 1820년대 이후로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중진국 함정’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나라가 없어요. 생각하지 않고 도달한 높이는 단단하게 유지되기 어렵고, 도약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능적·양적(量的)으로 몇 가지 면으로는 이미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생각하지 않고 이룬 업적이라면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을 어떻게 제고(提高)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철학자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큰 사명입니다.”
“국가 관념 약화, 심각한 知的 退行”
―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以上)이다’라고 말했어요. ‘지금의 상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것을 ‘건너가기’라고 표현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가르치면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하든지 탁월해질 수 있어요. 탁월해진 인간들의 수가 많아지면 그 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됩니다. 시대에 맞는 인재를 먼저 기르는 나라는 흥하고, 거기에 실패한 나라는 망하는 거예요.”
―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일단 세계를 보는 시각이 많이 후퇴했어요. 진영의 대립과 적대감이 더 심화됐어요. 근대국가의 진화(進化) 방향은 민족에서 국가로의 이행(移行)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 관념을 약화시키고 있어요. 이건 심각한 지적 퇴행(退行)입니다.”
―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대한민국이 건국된 게 1948년이냐 1919년이냐를 놓고 논란을 빚고,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 공무원들이 충성해야 할 대상이 국가인지 민족인지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한민국은 그동안 이룩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요.
“네이션 빌딩의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를 경험했고, 남북분단, 남북 간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근대국가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반공(反共)이데올로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공산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데 이 흐름을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북한과 그 동조세력이었죠. 민족 정통성을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에 두는 흐름이 생겼고, 그러면서 묘하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과 민족을 긍정하는 것이 같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 그렇습니다.
“민족감정에 빠지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로 보게 되고, 북한의 역사는 힘들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 나쁜 사람으로 평가되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운 사람들이 오히려 찬양받는 매우 부정적인 기류가 만들어졌습니다. 시민단체나 정치결사체들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은 그러면 안 됩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군(軍) 통수권자이고,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고 수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을 홀대하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운 사람을 높이려 하는 일은 대통령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민족과 국가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언급해 논란을 빚었다. 사진=조선DB |
“문재인 대통령은 그때 ‘현충원은 살아 있는 애국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애국’이라고 할 때의 ‘국(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입니다.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라고도 했는데, 애국으로 통합되어야 할 보수와 진보는 중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미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닙니다. 배타적(排他的)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일 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말을 할 때, 말로는 ‘애국’이라고 하면서 느낌은 ‘민족’을 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민족적 의미에서 기려야 한다면, 민족적으로 기리면 됩니다. ‘애국의 현장’은 대한민국만을 중심에 놓고 배타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국가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하고, 6·25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파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을 애국의 한 전형(典型)으로 제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래서 대한민국이 네이션 빌딩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네이션 빌딩이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현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헌법은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매뉴얼인데,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수호자로서 역할은 하려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 헌법을 넘어선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원수(元首)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복잡해지고 해결이 난망(難望)해집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동감입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민족의 시각으로는 국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시각으로는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민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국가들과는 다 등을 돌리고, 민족이라고 상상하는 북한에만 목을 매고, 그 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만 굽실거리는 것으로는 국가의 높이에 있는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아큐(阿Q)가 되어 풀리지 않은 현실을 풀린 것으로 ‘정신 승리’ 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한국군과 북한군
영화 속에서 북한 군인이나 요원들은 멋있게 그려지는 반면, 한국 군인이나 경찰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번째 국무회의를 백범기념관에서 했습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 등의 법통(法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자기의 피를 흘려서 국가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자기에게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각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천안함이나 연평해전 장병 등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운 사람들은 굉장히 홀대받고, 국군의날에 퍼레이드 대신 야간에 쇼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 최근 김원웅 광복회장이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참….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은 네이션 빌딩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왕 도움을 받아야 하는 초라한 형편에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소련에 의지했다면 우리는 전체주의적 억압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가난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미국에 의지했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북한의 삶보다는 대한민국의 삶이 천만 배 더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세요. 〈JSA〉를 보면 북한군 병사는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는 멋있는 사람으로 나오는 반면 한국군 병사는 결국 자살합니다.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 북한군 병사들은 질이 높고 군인으로서의 태도를 지키는데, 한국군 병사는 탈영병입니다. 〈공조〉라는 영화를 보면 한국 형사는 굉장히 천하게, 북한 경찰은 굉장히 멋있게 그려집니다.”
“내재적 접근법은 이론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것도 역시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지식인은 대부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보다 김일성을,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보다는 김정일을 높게 봅니다. 21세기에 3대 세습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계승’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한다면, 저는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김정일보다는 이명박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다가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수정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한동안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내재적(內在的) 접근법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사실 그건 이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이론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客觀性)과 보편성(普遍性)입니다. 주관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어디에나 치우침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북한을 이해할 때 북한의 내재적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대한민국을 이해할 때에도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내재적 조건을 가지고 이해해야죠. 대한민국을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민주 같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이해하고, 북한을 이해할 때에는 북한만의 특수한 조건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이론이 아닙니다. 어떤 지적 작업에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건 그냥 프로파간다죠. 지금 행세하고 있는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내재적 접근법을 가지고 북한을 이해했는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이것도 모두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중국 가보고 사회주의적 인식 벗어나”
― 지금 교수님의 말씀은 그 연배의 지적 흐름과 굉장히 다른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까.
“저는 1970년대 말부터 대학을 다니기 시작해서 대학원 과정까지 포함하면 1980년대 내내 대학에 있었습니다. 대학가가 굉장히 치열할 때였고, 제가 지금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시각들이 팽배했을 때였습니다. 저도 그 세례를 깊이 받았죠. 게다가 제 고향도 전라도고…. 그러다가 1990년에 중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을 보고, 북한 사람들을 직접 접하면서 그때까지 가졌던 사회주의적인, 혹은 북한에 대한 호의적 인식 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몸살처럼 한 달간 앓고 일어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통제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보고서도 안 벗어나더라고요.”
― 소위 철학자,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훈련을 안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안 받았어요.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게 아니라, 생각의 결과를 습득하는 훈련만 받았어요.”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자랑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최근 ‘친일청산’ 문제를 들고나온 것처럼, 이 문제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6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인화성(引火性)이 강한 정치적 무기다.
― 친일청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것을 대한민국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때 강대국끼리 벌이는 국제질서의 구조를 이겨낼 정도로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했습니다. 북한도 친일파를 완전히 척결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초대(初代) 내각에도 친일파가 많았잖아요? 남한이나 북한이나 외세의 간섭 아래 황망하게 국가를 세우면서 친일세력을 완전히 척결할 수 있는 독립적 구조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日帝시대에 태어났다면…’
― 그래도 오늘날까지도 친일파 척결을 못 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복회장도 박정희의 공화당에 ‘자발적’으로 공채시험을 봐서 들어갔고, 전두환(全斗煥)이 주인 노릇을 하던 민주정의당에서 조직국장도 지냈고, ‘토착 왜구’들이 득실댄다던 한나라당에서도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그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튼튼한 국가의 보호를 받던 사람도 생계 때문에 자발적으로 ‘토착 왜구’들 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생계가 해결되고 나자 이제는 친일 인사들의 ‘파묘(破墓)’까지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없어진 지 2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는 한 사람이 살 궁리를 한다면 대체 어떠했을까요? 여기에는 친일, 반일의 문제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 자체에 대한 기억이 없고, 국가의 보호를 받아본 기억도 없이 식민지가 된 지 이미 20년이나 흐른 시점이라면, 그래도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은 하지만, 솔직히 저는 그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식민지 구조 속에서나마 더 나은 직업을 찾으려 노력했을 수도 있습니다. 열다섯 나이에 철이 들어보니 식민지가 된 지 20년이나 지났다면, ‘나는 죽어도 간도특설대 장교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노력하여 흥남시청의 농업계장이라도 하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저보다 공부도 더 잘하고 높은 자리에도 쑥쑥 올라간 광복회장도 ‘생계’ 때문에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저 같은 미물(微物)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국가의 목표는 富國强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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