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소개] 새말 새몸짓, 그 나비가 날았다 <아주경제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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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의 파르헤지아] 새말 새몸짓, 그 나비가 날았다
- 철학자 최진석과 건축가 윤경식…세계건축상 대상받은 함평 호접몽가의 비밀
- 이상국 논설실장
- (isomis@ajunews.com)
- 입력 : 2020-10-06 02:20
- 수정 : 2020-10-07 07:40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그 아래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윤편(輪扁)이란 목수가 문득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감히 묻노니, 왕께서 읽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공은 말했다. "성인의 말씀이라네." "그 성인은 아직 살아있습니까?" "이미 돌아가셨지." 이렇게 문답이 이어졌다. 그때 윤편이 말했다. "그렇다면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糟粕)로군요."
환공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찌꺼기인가?"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보건대, 나무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헐겁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서 이뤄지고 마음이 응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결은 자식에게도 알려줄 수 없기에 70의 나이에도 제가 직접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마찬가지로,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을 가진 채 죽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읽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장자의 '윤편 스토리'를 윤편의 목소리로 지금 막 열강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철학자 최진석(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서강대 명예교수)이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 입영 신병처럼 짧은 은백의 머리카락, 웃으면 생겨나는 도가풍(道家風)의 눈가 주름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그 전해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전해줄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의 밑에서 아무리 그의 말을 받아먹어도 진실을 얻을 순 없습니다. 윤편의 손에 그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을 얻는 것이 독립이며 자유입니다. 지식의 생산자는 자유롭고 지식의 수입자는 종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윤편의 손을 갖는 것이지 환공처럼 읽고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비의 땅에 나비의 이름으로 나비의 집을
이 강의가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울려퍼지고 있는 곳은 전남 함평의 '호접몽가(胡蝶夢家)'다. 최 교수는 59세 때 강단을 내려와 방송사 인문학특강으로 강호(江湖)학자가 되었다. 창조적 인문학 사령부를 꿈꾸며 '건명원(建明苑)'을 만들었다. 이후 '새말 새몸짓' 운동을 시작했다. 그 '새몸짓'으로 고향 함평에 돌아와 차린 것이 '호접몽가'다. 기이하다. 나비의 꿈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냐고 묻던 장자에 파고든 학자의 고향이 하필 '나비축제'로 유명했던 곳이 아닌가. 거기다가 그가 지은 강의동 별채를 가리키는 말이 파빌리온(pavilion)이며, 그것은 라틴어 파필리온(papilion·나비)에서 나왔다.
올해 완공된 이 건물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적인 건물'이 되었다. 6일 발표된 2020년 세계건축상(World Architecture Award, 제35회, 독일재단) 대상(大賞)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대체 이 '장자의 꿈'을 지상에 펼쳐놓은 '윤편' 같은 솜씨는 어느 손에서 나온 것인가. 윤경식 한국건축회장(63)이 그 사람이다. 그는 이날 그의 또 다른 건축 작품인 삼각산 도선사 '소울 포레스트'도 대상을 받아 2관왕의 영광을 안았다.
윤 회장 또한 노장(老莊)을 체득한 사람이다. 그는 도덕경을 인용하며 입을 열었다.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聖人爲腹不爲目)고 노자가 말했습니다. 일시적 감각의 충족이 아니라 본래의 필요를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각적 아름다움보다는 본연의 쓸모에 가 있는 건축이 지속가능한 건축입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욕심내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는 거죠. 최소한의 형태와 인테리어로 공기와 빛이 잘 드나드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배를 위한 건축'이 아닐까요."
인천 검단공단의 IK그룹 사옥을 지을 때, 인접한 서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이 골치였다. 그의 해법은 이 바람을 막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건물로 불어오는 북서풍이 건물을 관통하며 지나가도록 건물 아래쪽을 비워 바람길을 냈다. 환기효과도 뛰어났고 건물도 쾌적한 형상이 되었다. 이것이 '무위(無爲·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사상이 아니냐고 말하며 웃었다. 이 정도면 도사(道士)급 아닌가.
노장의 철학과 노장의 건축이 만나다
그러니까 노장의 철학과 노장의 건축이 '나비의 꿈'에서 의기투합해 현실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호접몽가에 걸맞은 탄생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이 강의동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넘어, 대한민국 로컬리즘의 의미심장한 방향전환을 기표하기도 한다. 이른바 산업화의 수도권 집약으로 로컬의 가치가 왜곡되고 문화적 황폐화를 불러온 현상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겼다. 최진석 교수는 이른바 대전환기의 국가 비전과 경영을 새롭게 할 '철학적 테제'를 세우고 확장해나갈 중심으로 이 함평 호접몽가를 일으켰다. 고대 그리스의 '아카데미아'와 같이 하나의 기원(起源)으로 만들려는 꿈을 꾸고 있을까.
건물로 다가서면 철학의 목소리가 들리고 미학적인 향기가 돋는 듯하다. 가벼운 지붕 구조, 나비날개의 이미지, 열주(列柱)의 수직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상승감, 어깨를 나란히 한 블록들이 자아내는 속삭임 같은 공간들, 틈새로 스며드는 빛은 깨달음의 은유다. 건물은 위압적이지 않아 나직하고 음전하다. 색상과 질감은 자연에서 옮겨온 도가적 감수성이다.
윤 회장은 이 건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장 철학의 근본인 '무한한 지식에 대한 경계심'을 바탕으로 철학자의 끊임없는 정진과 겸손, 그리고 새로운 삶의 철학을 담고자 했습니다." 또 최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소중하고 당신이 소중한 걸 알기 위해선 바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앎이란 배타적인 구석이 다분해서, 결국 자기 구속이고 속박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린 수입된 철학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 인문학 특강의 열기가 자기 사유보다 남의 사유를 섬기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전문가의 말을 다 믿어서도 안 됩니다. 그의 말에 대해 가차없이 질문으로 맞서야 합니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납니다. 큰 질문이 큰 인물을 만들어냅니다."
호접몽가에서 철학을 지닌 건축, 건축으로 표현되는 철학을 본다. 호접몽가는 하나의 가차없는 질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남의 사유만을 섬기는가?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고 있는가? 골똘한 생각의 깊이가 이룬 철학적 건축물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면서, 김구가 말한 문화강국의 꿈이 지금 여기서도 농익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K-건축과 K-철학이 더불어, 깊이 체득한 자기 사유에서 돋아난 날개를 펴고 있는 현장을 보는 감회다. 새말 새몸짓으로 나는, 처음 보는 나비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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