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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69] 명사로는 계란 하나도 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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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회   작성일Date 25-04-29 22:53

    본문

    세계는 잠시도 정지하지 않습니다. 항상 움직여요. 그런데.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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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69
    2024. 8. 26.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가져왔습니다. "명사로는 계란 하나도 깰 수 없다"라는 제목의 글인데요. 이 글은 우리에게 변화하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인문적 통찰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번 한주도 경쾌하게 다음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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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명사로는 계란 하나도 깰 수 없다


      

     저는 어렸을 때,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곤 했습니다. 작고 어린 쥐 제리와 크고 못된 고양이 톰 사이에 옥신각신 벌어지는 다양한 얘기들이지요. 근데요, 자세히 보면 정작 못된 놈은 제리일 때가 많아요. 이야기 구성이 대개는 제리가 톰을 약 올리고, 약이 오른 톰이 제리를 쫓다가 결국엔 당하는 식이거든요. 계속 골탕 먹는 톰이 불쌍했어요.

     

     자, 그날도 제리가 톰을 깐죽깐죽 약 올립니다. 화가 난 톰이 죽어라 쫓아가지요. 쫓아가고 또 쫓아가는데 제리가 살짝 피합니다. 그러면 맹렬히 달려오던 톰이 벽에 부딪쳐서 찰싹 달라붙어요. 마치 종잇장처럼 벽에 달라붙습니다. 종잇장 모양으로 달라붙어서 잠시 머무르던 톰이 서서히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지요. 이미 톰은 거의 사망의 경지인지라, 자신을 포기한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벽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데, 벽에 있는 굴곡과 모양을 모두 경험(!)하면서 내려오지요. 다 흘러 내려와 바닥에 종잇장처럼 쭉 뻗어 있던 톰이 1~2초가량 그대로 있다가는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원래 모양을 회복합니다. 이것이 <톰과 제리>에 가장 자주 나오는 장면 같아요.

     

     근데요, 이 이야기 속에서 만약 톰이 자기의 원래 모습인 고양이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벽에 있는 모든 굴곡과 세세한 틈새 등을 경험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지만, 자기 모습 그대로는 접근도 할 수 없지요. 톰이 기절해서 자기 몸의 형태를 포기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 모든 굴곡이나 자기 몸의 형태를 포기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 모든 굴곡이나 세세하게 갈라진 틈새들을 다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학 다닐 때 친구의 자취방을 찾아가 내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기에는 그날 저녁의 식사와 술이 걸려 있습니다. 그 당시에 자취집은 마당에 수도가 있고, 그것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수돗가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세숫대야가 있습니다. 모양은 주동이가 크게 밖으로 벌어졌고, 재질은 스테인리스로 된 거예요. 제가 말합니다.

     

    “내가 계란을 이 방 어딘가에 놓을 텐데,

    그러면 네가 저 세숫대야로 그 계란을 깰 수 있겠니, 없겠니?

    네가 깨면 내가 밥도 사고, 술도 사 주마.

    만약 못 깬다면 네가 다 사라.”

     

     친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깰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 계란을 어디에다 놓을까요? 저는 계란을 두 벽과 방바닥이 만드는 바로 그 모서리의 구석에다가 얌전히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가 세숫대야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데 도저히 그 구석까지는 닿을 수가 없어요. 결국 제가 이깁니다.

     

     그런데 계란을 깰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지요. 뭘까요? 그것은 세숫대야가 자기 모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포기하고 찌그러지면 그 모서리에 닿을 수 있겠죠. ‘자기포기!’ 계란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계는 잠시도 정지하지 않습니다. 항상 움직여요. 그런데 인간의 사유, 개념, 지식은 모두 정지되어 있어요. 틀이 갖추어져 있지요. 명사형이에요. 이 특정한 틀을 포기하는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계란 하나도 깰 수 없어요. 지식과 이념의 틀로부터 벗어나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힘’이에요. 바로 ‘주체력’이고 ‘덕’이에요. ‘욕망’의 친척들이지요. 거듭 강조하건대, 인문적 통찰은 명사 형태로 시멘트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 가는 틀을 자기가 뚫고 나올 수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대답하는 주체에서 질문하는 주체로 전변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285~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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