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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168]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일'을 보라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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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회   작성일Date 25-04-29 22:52

    본문

    ‘죽음’에 매달리지 말고 ‘죽어가는 일’을 응시하길 바랍니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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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68
    2024. 8. 19.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글은 '죽음은 개념이고, 실재하는 것은 죽어가는 일이다'는 것을 다루고 있는데요. 철학자는 이를 통해 인문학적 통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인문학적 통찰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번 한주도 경쾌하게 다음으로 건너가는 나날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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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일'을 보라


     

     철학을 공부하려고 맘먹을 때는 막연하게나마 무슨 진리가 나에게 발견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체계적 이론일 수도 있고,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생겨 먹었을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감도 잡지 못했지요. 그저 어떤 빛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것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미 만났는데도 그냥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게 하나 분명한 것은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가지게 된 생각 중에서는 가장 진리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도 여러분들도 금방 죽습니다!

     

     느닷없이 죽음 운운하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졌나요?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이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기분은 조금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여러분들도 아마 거의 동의하실 겁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나면 강의실이 일순 조용해집니다. 삶의 밑자락에 흐르는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사실을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망연자실하고 말지요.

     

     이렇게 한순간에 밀려오는 뭉툭하고 싸늘한 이 느낌은 아마 ‘깨달음’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교감이 소용돌이처럼 함께 돌아 버립니다. 바로 그 순간의 느낌을 계속 잡고 있으면 삶의 질은 매우 높게 지속되고, 태도는 진중하며, 중후한 거동과 통찰의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이 느낌이 5분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말이죠. 그럼 왜 숙연함이 유지되는 시간이 그렇게 짧을까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이죠. 죽음!

     

     하지만 이 세계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개념이에요. 구체적인 실재가 아닙니다. 그럼 이 세계에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죽어가는 일’이 존재해요. 이 세계에 진짜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건’입니다. 개념에 의해 인간이 움직여지기는 어렵습니다. 피상적으로 짧은 충격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에 의한 피상적 충격은 심연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지요. 영혼을 자극하지는 못합니다. 영혼은 우리의 것으로 공유되지 않습니다. 고유한 나의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것이지만, 나의 것은 아닙니다. 죽어가는 일, 죽어가는 사건이 비로소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일상에서 죽습니다. 보편의 세계에는 ‘우리’가 존재하지만, 일상의 세계에는 ‘내’가 존재합니다. ‘죽음’은 보편이지만 ‘죽는 일’은 일상입니다. 보편적 개념으로 내 영혼을 자극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건을 한 번이라도 가까이 접해 본 사람과 가까이서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요. 시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져 본 사람, 임종을 한 번이라도 지켜본 사람은 달라요. 왜? 그 사람은 죽어가는 일을 봤으니까요. 죽음이라는 개념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건을 접한 것이지요.

     

     인문학적 통찰은 뭐냐? 바로 ‘죽음’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일’이 “툭!” 하고 경험되는 거예요. 개념을 봤는데, 사건이 느껴지는 거지요. 죽음이라는 명사가 갑자기 동사가 되어 자기에게 파고드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명사로 굳어진 사람이 동사적 율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체력을 회복하는 일이자 덕의 힘을 갖는 일입니다. 여러분, ‘죽음’에 매달리지 말고 ‘죽어가는 일’을 응시하길 바랍니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227~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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