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는 익숙함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이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나는 탐험과 모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면, 그것은 철저한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했다.
탐험 정신이 살아 있는 문명은 강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문명을 강하게 만드는가? 문명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이 문명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매우 효율적인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자 이론이다. 앎의 체계인 것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을 생산하는 문명은 통제력이 클 수밖에 없고, 통제력이 큰 문명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문명은 종속적이기 때문에 주도권이 없어 강한 면모를 보이기 어렵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보통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앎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 지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몸부림쳐야 한다.
최진석,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면서>.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북루덴스, 2022 100-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