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기의 힘
나는 외우기를 강조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이나 문장은 외워야 내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어느 기자는 나에게 ‘창조 인문학 전도사’라는 간판을 달아주었다. 이제는 ‘무엇’을 전하는 일보다,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다 보니 ‘전도사’라는 명칭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인문적인 높이의 활동이 갈급한 시대라서 이 정도 간판이라면 의미가 작지 않으니 감사히 받아들인다. 이쯤에서 가끔 시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창조나 창의를 전도한다면서 외우기를 강조하니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 나누기를 할라치면 수만 가지 기준이 있을 것이다. 시(詩)를 가지고도 나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범박하게 보자면 사람은 시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크다. 시를 읽더라도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감행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또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육화(肉化)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 육화의 길에 바로 외우기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이리하여 사람은 다시 시를 외우는 사람과 외우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겠다. 시를 외우면 시인이 시를 타고 침투해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더 커져서 시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시의 석양 같은 운명이다. 내가 외운 시로 시인이 내 안에서 영역을 확대한다기보다는, 시인 몰래 내가 자라 버린다. 무엇보다 시를 지배하는 인간이 가장 상급이다.
10∼20년 전부터 관공서나 기업이나 학교 등등의 기관에 ‘창의’ ‘상상’ ‘창조’ ‘선진’ ‘선도’ 등과 같은 구호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구호를 담은 현수막은 결핍과 희망을 동시에 말한다. 없으니 가져 보자는 선동이다. 이렇게 현수막을 높게 달아 놓고 긴 시간 펄럭였지만, 지금 우리가 창의적인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그렇게 강조했지만 왜 아직까지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 혹시 접근이 잘못되고 있어서가 아닐까?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창의적인 결과들도 ‘바로 그것’을 발휘하려고 의도해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강한 충동이나 자신에게 등장하는 문제점을 깊이 파고들다가 그냥 펼쳐진 것들이다. 대답의 결과가 아니라 깊고 긴 질문의 결과들이다. 정답을 찾기보다는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만의 문제에 집착한 결과이다. 돈오의 깨달음처럼, 축적된 내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그래서 창의력은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기능적인 활동이 아니라, 내면의 깊숙한 곳에 연결되어 있는 인격의 힘이다. 사회적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있지 않다면, 그건 분명히 창의력이 튀어나올 정도의 인격적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드물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창의적이지 못하다면, 창의적인 두께의 인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창의성이 필요하다면, 창의성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격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단련된 내면을 갖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놀이나 공상에 빠지기나 지루함을 견디기나 예민한 감각이나 운동이나 글쓰기나 낭송 같은 것들이 오히려 창의력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활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외우기도 이런 것들과 함께 큰 몫을 한다. 창의성은 축적되고 단련된 내면의 폭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은 지식을 축적하는 일로 길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흔히들 창의성을 지식의 축적과 반대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렇다고 하여 지식의 축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축적된 지식의 양은 분명히 창의성의 수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식이 ‘나’의 내면을 단련하는 일에 사용되었느냐, 아니면 내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관리자로 남았느냐이다. ‘나’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지식의 인격화가 관건이다. 외우기는 나를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틀을 깨고 나올 힘을 갖도록 단련시킨다.내가 창의성 곁에 외우기를 함께 두는 이유이다.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177-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