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질보다 기능, 실제보다 도덕, 이익보다 명분, 질문보다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 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 놓은 규제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르는 것이다. 빅 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 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
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그 이상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되찾아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 가도 괜찮겠는가? 낡은 문법과 결별하여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 모든 생각.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 보세.”
최진석,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북루덴스, 2021, 245-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