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인 높이에서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과에 간다. 철학과에 진학하는 목적은 스스로 철학적인 높이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런 능력은 단기간에 배양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합의하기를 최소한 4년은 공부해야 기본적으로나마 철학을 할 수 있겠다고 해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철학과를 다니다. 스스로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우선은 먼저 스스로 높은 생각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앞선 사람들의 활동을 배운다. 즉, 앞선 철학자들이 해낸 생각의 결과들을 먼저 배운다.
그런데 우리가 앞선 철학자들이 해낸 생각의 결과들을 배우는 목적은 그 철학자가 자기 생각의 결과로서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라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은 생각의 결과를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철학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철학적인 높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왕왕 생각의 결과들을 배우는 데 집중하다가 정작 자신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게 되기도 한다. 4년의 시간 동안 생각의 능력을 줄이고 오히려 생각의 결과를 숙지하는 능력만 키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특정한 철학자들의 철학 이론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데, 정작 자신은 자신이 처한 자신만의 시대를 자신만의 철학적 시선으로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철학자들의 ‘철학’은 사실 그 철학자가 자신의 시대를 매우 높은 차원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포착한 결과일 뿐이다. 철학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철학자의 전도사로 전락해 보리는 일은 철학의 본령이 아니다. 그 철학자를 사다리 삼아 올라가서 한번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시선에 동참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다리를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다시 내려갈 퇴로를 스스로 차단해 버린 후에 더 높이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한 형국으로 스스로를 자폐시키는 행위, 여기서 비로소 철학이 작동한다.
그래서 철학은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는 순간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철학으로 생산되는 순간 비철학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비극적 운명으로 태어났다. 철학은 완성되는 순간 철학으로서의 생명을 상실한다. 철학은 활동으로만 존재하지, 견고한 건축물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하기 때문에 철학적인 시선은 모든 분과 학문이 가장 높은 단계로 승화하거나 삶의 가장 고양된 단계에서 발휘에서 발휘되는데, 이것은 내용으로가 아니라 활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어떤 학문이 그 활동성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적이 있는가. 오직 철학만이 ‘활동’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다. ‘philosophy’, 즉 지성(sophia)을 사랑하는 행위, 지성적 레벨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행위, 지성적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하는 행위 자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중략) 자신만의 활동으로 세계와 접촉하려는 용기가 바로 창의성이다. 내용에 대한 집착을 끊고 아무 내용도 없는 활동으로 덤비자. 이것이 동사로서의 ‘철학’이다.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283-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