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행하는 인간과 이야기하는 인간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이 한곳에 멈춰 있지 않고 건너가는 일인 것처럼, 이야기도 한곳에 멈춰 있는 논증이나 논변과는 다른 표현형식이에요. 저는 건너가는 인간, 여행하는 인간, 질문하는 인간 그리고 이야기하는 인간, 이들을 다 한 부류로 이해합니다.
질문을 하거나 건너가기를 하는 사람들이 탁월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삶도 옳은 삶에 묶이지 않고 나만의 신화를 쓰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스토리를 대신 수행하거나 따라 하는 것이 아닌 내 스토리를 구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는 말은 스스로가 삶의 스토리 구성자로서 내 삶을 내 이야기로 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리버 여행기』, 즉 여행하는 인간 다음으로 이야기하는 인간을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지요.
『이솝우화』를 포함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 나눈 책들에는 일관된 주제가 있어요. 여행하는 인간이나 이야기하는 인간처럼 탁월한 인간은 모두 자기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념을 섬기지 않고, 타인을 섬기지 않고, 자기를 섬기지요.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여행한다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도 여행자였고, 데미안도 여행자였어요. 특히 『걸리버 여행기』는 여행 자체를 이야기의 주제로 삼고 있지요. 저는 이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또 다른 유형이 이야기하는 자라고 생각해서, 여덟 번째 책으로 『이솝 우화』를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많이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제우스를 숭배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신화를 쓰는 연료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신처럼 자기를 섬기며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 제우스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러분들과 이런 확신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자기 신화를 쓰는 것이다.” 문명의 크기는 신화의 크기로 나타나고 그 신화의 황당무계함이 그 문명의 두께를 결정하듯, 자기 신화를 어떻게 쓰는지가 자기 삶의 전체 격조를 결정합니다. 황당무계한 삶을 이야기하고 그런 세상을 꿈꿀 때 삶도 그 안에서 크게 확장하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은 황당무계해야 합니다.
사람이 황당무계함을 잃으면 따분하고 지루해집니다. 그리고 어딘가 불안하지요. 황당무계한 사람은 기개가 높고 가슴이 넓습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전부 황당한 거예요. 우리가 건너가고 꿈꾸는 일들도 전부 황당한 일이지요.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걸음』, 열림원, 2022, 235-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