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뱀의 껍질은 뱀의 한계이다. 더 커지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한다. 껍질을 벗지 못하면, 성장이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는다. 뱀에게 껍질은 한동안 보호막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한계에 이르러 파멸의 장막이 된다. 모든 존재의 생존은 결국 한계와의 싸움이다. 한계를 깨고 나아가면 생존이 지속되고, 한계에 갇히면 파멸한다. 나라나 사람이나 똑같다. 더 잘 되려면, 우선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분투해야 한다.
한계는 사실 생각의 한계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질문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은 대답에만 빠진다. ‘대답’이 극단적으로 퇴화한 한 형태가 ‘위정척사’이다. 마음은 늙지 않고, 생각은 늙는다. 대답에만 빠져 살다가 생각이 늙으면 ‘위정척사’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일상에서도 꼰대는 낡고 늙은 생각에 빠져 위정척사의 한계에 갇힌 사람을 말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한계에 갇혀 조선말의 ‘위정척사’를 다시 살고 있다.
대체 어느 지경까지 왔는가. 상대방이 틈만 보이면, 그 틈이 크든 작든 간에, 그것을 기화로 상대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겠다고 위정척사의 칼을 휘두른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름에 들어있는 스펠링을 ‘z’가 아니라 ‘s’로 잘 못 쓴 것도 입장에 따라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의 큰 문제로 둔갑한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일사불란’을 ‘일사분란’으로 쓰거나, 정상회담 차 간 상대국의 방명록에 ‘대한미국’이라고 쓴다. 사소한 예를 들었지만, 이런 경우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정도로 나의 수준을 낮추고 싶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이게 나라냐?”라는 비판을 하면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이건 나라냐?” 소리를 듣는 지경에서 역할을 서로 바꾸며 계속 맴돌고 있음을 알자고 호소할 뿐이다. 한계에 갇혀, ‘황윤길’과 ‘김성일’을 다시 살고 있음을 알자고 할 뿐이다. 우리는 생각의 한계에 갇혔다.
한계를 한계로 인식하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다 능력이다. 한계를 한계로 인식할 정도로 생각의 그릇이 커 있어야 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아편전쟁으로 동아시아는 서양의 과학 문명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중국과 일본은 왜 당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고, 패배를 안긴 서양을 배우는 데에 우선 온 힘을 기울인다. 중국의 “서양을 배우자!”(向西方學習)나 일본의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으로!”(脫亞入歐)라는 구호는 모두 다 자신의 한계를 자신에게 질문한 후 얻은 자강의 방책이었다. 생각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보려는 지적인 태도를 기르지 못했고, 복수를 꿈꾸지도 못했으며, 그저 비난만 하고, 남 탓만 하는 맹목적 위정척사에 빠졌다.
혹자는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력에 우쭐대기도 한다. 물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번영의 지속 여부는 우리가 가진 ‘생각 그릇’의 크기가 결정한다. 지금은 반도체가 최첨단 전략 물자이지만, 1800년대부터 1900년대 초기까지는 지하철이 그러했다. 일본 도쿄에 지하철이 1927년에 생긴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이보다 14년이 이른 1913년에 생긴다. 지금 아르헨티나는 어떠한가? 그때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생각 그릇’의 크기가 그 번영을 지속시킬 정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영을 누리면서도 그 번영에 맞춰 ‘생각 그릇’이 커지지 않은 나라는 세가지 현상을 앓다가 추락한다. 극심한 사회분열, 극심한 정치 갈등, 극심한 포퓰리즘. 이 세 가지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서 각자의 ‘위정척사’ 이외에는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힘을 빌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난 후, 1882년 여름, 조선과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한다. 그 전문에서는 “이번에 제정한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이라며 조선을 속방, 즉 속국으로 표시하고 있다. 주자학만 모시느라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던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속국으로 취급받다가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친일청산 만 논할 때가 아니다. 이제는 생각을 시작해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살필 때이다. ‘독립’을 살피지 않고, 입에 발린 친일 청산만 외치다가 어떤 나라가 대한민국의 영토와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지도 않고 다 가지려고 욕심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긴 시간 생각을 끊고 단세포적인 위정척사에만 빠져있다가 배부른 바보가 되어가는 중이다.
생각이 없으면, 한계를 한계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깨부수지도 못한다. 이것은 의식과 관련되므로 쉽게 되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생각 그릇’의 크기에 따라 정해지는 운명이 있나 보다. 이 글을 읽고도 내 편의 글이네, 네 편의 글이네만 따질 모습이 그려지니 갈 길은 멀고 참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