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요를 경험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고요를 경험해야만 큰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루쉰이 고요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요란 무엇일까요? 아주 조용한 것,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것, 이것은 고요가 아닙니다.
고요는 그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충격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골프를 칠 때 백스윙에서 다운스윙으로 내려오면서 방향이 바뀌는 교차점, 이것을 고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운스윙의 방향, 속도, 타점 같은 것들이 결정되지요. 즉, 구체적인 동작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고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쉰이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면서 의사가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가 엄청난 각성 일어나서 방향이 급변했지요. 고요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고요를 경험하고 그 충격과 탄성으로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된 것이지요. 루쉰은 그냥 살던 대로 살 수도 있었어요. 의사가 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며 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고요를 경험하고 각성하여 새 사람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자기가 해야 할 진실한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요를 통해서만 소명을 발견할 수 있어요. 고요를 경험한 그 순간이 이후의 루쉰을 만든 것이지요.
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도 고요의 한 형태라고 봅니다. 회심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는 하느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경험할 수 없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 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순간이 너무 많을 필요는 없어요. 딱 한 번이면 됩니다.
고요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에요. 찰나의 순간이지요. 운동 방향을 달리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충격입니다. 관성적으로 사는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