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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66] '기본'을 닦는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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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07회   작성일Date 23-04-30 23:01

    본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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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66
    202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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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입니다. 매주 월요일 철학자 최진석의 글과 (사)새말새몸짓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헌 말 헌 몸짓에서 새 말 새 몸짓으로 나아가자는 저희들의 외침이 한 단계 더 성숙한 '나', 더 상승하는 '우리'가 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지난 9월 1일부터 기본학교 3기 학생 모집중에 있습니다. 이번주에는 이 기본학교가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글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기본이 전부다>라는 글인데요, 몇번 소개되었던 글이지만, 기본이라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화두인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한번 확인해 보세요. 

    •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기본'이 전부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힘은 ‘본능적인 동작’이 아니라 ‘인위적(人爲的)인 활동력’이다. 사람은 인위적이고 의도적(意圖的)인 동작을 해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점점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본능적인 동작’의 테두리에 갇힌 것이 동물이고, ‘인위적인 활동’으로 본능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학습이 필요하고, 동물에게는 학습이 거의 필요 없다. 누가 더 사람이 되느냐 하는 점은 누가 더 학습하느냐로 결정된다. 학습의 전 과정에 철학을 담아 체계화 한 것을 우리는 교육이라고 한다. 동물이라면 학습이 필요 없으니 교육도 필요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되는 여정에는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다. 종교 수련의 전 과정도 다 교육이다. 군대 훈련의 전 과정도 다 교육이다. 교육의 정도가 종교인의 수준을 결정한다. 교육의 강도가 군인의 용맹성을 결정한다.



      사회가 작동되는 중심 톱니바퀴가 두 개 있으니 바로 정치와 교육이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회의 정치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의 답과 일치한다. 그 사회의 정치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회의 교육이 어떠한가라는 질문의 답과 아주 잘 맞는다.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도 교육의 결과다.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정치’가,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정치’가 태어난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의 뿌리 동력은 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이 한 나라 백 년 후의 전망을 결정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교육 무용론은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 방법에 대한 회의에서 빚어진 착각이다. 교육 무용론은 있을 수 없고, 특정한 교육 방법 무용론은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다 교육생으로 살다 간다.



      문제는 교육 받은 군인이라고 다 용맹한 것은 아니고, 교육받은 종교인이라고 해서 다 수준 높은 종교인인 것은 아니다. 교육 과정을 다 마친 학생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인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 목적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교육을 받고도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능력을 배우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왜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능력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가. ‘창의’나 ‘도전’은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이다.



      사람은 문명(文明)을 건설하는 존재다. 인간이 한 모든 활동의 총체가 문명이다. 심지어는 문명을 부정하거나 문명을 비판하는 태도 또한 문명적인 활동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을 문화(文化)라고 한다. 인간을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화는 “무엇인가를 해서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변화를 야기하는 일이 자신에게서나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인 활동성이다. 이런 근본적인 활동성을 가진 인간들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한다.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질문하는 사람이, 종속적인 사람보다는 자유로운 사람이, 패륜적인 사람보다는 윤리적인 사람이, 훈고하는 사람보다는 창의적인 사람이, 따라하는 사람보다는 먼저 만드는 사람이, 비굴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용기 있는 사람이, 답습하는 사람보다는 도전하는 사람이 더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대답’, ‘종속’, ‘패륜’, ‘훈고’, ‘따라 하기’, ‘비굴’ 그리고 ‘답습’보다는 ‘질문’, ‘자유’, ‘윤리’, ‘창의’, ‘먼저 하기’, ‘용기’ 그리고 ‘도전’이 변화를 야기하는 데에 더 적극적인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앞 쪽에 나열한 것들보다는 뒤 쪽에 나열한 것들이 더 사람다운 활동들이다.



      교육의 관건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변화를 야기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지식에 매몰되거나 이념에 빠져 있으면 변화가 힘들다. 알고 있는 것을 수호하거나,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만 세상을 보며, 굳은 신념이 된 이념을 매개로만 세상과 관계한다면 변화는 경험할 수 없다. 자신도 변화를 경험할 수 없고, 세상에 변화를 야기할 수도 없다.



      자전거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알고 있는 그것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전거를 타지 못하던 자신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변화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전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많이 갖게 하는 데에 시간을 거의 다 쓰다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전에 나서는 일을 소홀히 하기도 한다. 자전거에 대한 지식이 자전거를 타보려는 용기로 바뀌는 일은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이 필요하다.



      교육 일선에 있으면서 이것저것을 시도해보았는데, 결국은 교육을 통해서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변화’라는 것은 교육의 매커니즘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교육 받고 나서도 교육 받기 전하고 똑같다면 교육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피차간에 지식의 습득이나 축적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교육 환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을 축적한 다음의 인격적인 변화 혹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독립적 인격이나 창의력이나 행복이나 자유나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3인칭의 시점에서는 변화를 얘기하고 창의력을 얘기하지만, 정작 1인칭 시점에서는 변화나 창의력에 집중하지 못한다. ‘변화’에 대해서 토론하고 의견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 내부에서의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대신에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을 강하게 지키는 일을 더 잘한다. 변화를 중심 주제로 정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변화에 대해서 강의하고 토론하여도 정작 변화를 감행하는 인격으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항상 부족했다.



      강의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왔다가 급히 두어 과목 강의를 듣고 다음 일을 위해 허둥지둥 돌아가는 모습은 항상 안타까웠다. 심지어는 강의가 길어지면 결혼식 참석 등과 같은 다음 약속 때문에 먼저 가기를 청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 프로그램이 교육 제공자나 수요자 모두에게 다른 여러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는 한 별 의미가 없다.



      교육이 진행되는 그 앞뒤의 생활에서 다른 것들이 그림자로 밀려나고 그것만 오롯이 고독한 형태로 솟아날 수 있을 때에만 교육 효과가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 가지 가운데 다른 스펙 하나를 더 올리는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너무 번잡한 일들로 포위된 교육은 효과가 없었다. 많고 번잡한 일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는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우리’로 있으면서 번잡한 문제들에 휩싸여 있을 때의 ‘나’는 ‘나’로 존재하기 힘들다. ‘질문’, ‘자유’, ‘윤리’, ‘창의’, ‘먼저 하기’, ‘용기’ 그리고 ‘도전’ 등은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출현할 수 없다. 오직 ‘나’로 존재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독립적 주체’들의 몫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교육의 최종 단계는 ‘독립적 주체 만들기’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귀하고 높은 질문은 어쩔 수 없이 ‘나는 누구인가’가 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 누구나 기본만 갖추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이 없이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기본 가운데 기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바로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려는 문을 연다는 뜻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근본 질문 옆에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몇 개의 질문들이 포진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번잡한 일들로 포위된 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 골똘히 빠질 수 있는 고독한 시간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고독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스스로가 답을 찾아 자신의 존재적 목적을 찾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들이 가능해 진다는 것을. 나머지 모든 일들을 수준 높은 상태로 가능케 하는 태도들이 바로 ‘질문’, ‘자유’, ‘윤리’, ‘창의’, ‘먼저 하기’, ‘용기’ 그리고 ‘도전’ 등등인데, 이런 태도들은 고독한 상태에서 앞에 제기한 몇 가지 질문들에 집중한 결과로 얻어질 수 있다. 자신을 성찰하는 고독이 동반되지 않은 교육은 성공하기 힘들다.


      그래서 요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런 꿈을 꿔본다. 내 고향 함평에 조그만 집을 지어서 ‘기본’을 닦는 도량을 여는 것이다. 6개월이나 1년 정도의 일정 기간을 정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학교 이름을 ‘기본 학교’라고 짓는다. 다른 지적 활동들도 모두 이런 질문들을 에워싸고 진행한다.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온전히 이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과만 함께 한다. 서울에서 함평까지 온다면 2시간 30분은 써야 한다. 다른 곳에서 오더라도 최소한 1시간은 써야 한다. 이 2시간30분은 온전히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이다. 도착하여 30분 정도 명상을 하며 고독을 내면화 하고, 내면화 된 그 고독을 힘으로 써서 치열한 지적 토론을 한다. 그리고 늦은 저녁 시간 또 2시간30분의 시간 내내 고독한 상태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고독이라는 ‘자신 만의 동굴’에 적어도 5시간을 머무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최소한 5시간 동안의 고독이다. ‘고독’을 생산하는 수고와 불편함이다. 수고와 불편함은 ‘고독’을 더욱 고독하게 한다. ‘고독’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소한 것들을 일거에 소멸시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남길 수 있는 폭탄이다. ‘독립적 주체’로 성장시키는 특효약이다.



    최진석, <기본이 전부다>,《광주일보》, 2020년 0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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