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지금 우리의 혁신은 2020년, 새해가 밝았다. 보통은 새해를 '새로운 해'나 '새로워진 해'라고 이해하지만, 난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본다. '새로운'이나 '새로워 진'은 상태를 형용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사를 사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는 동사다. 모든 존재가 동사적 형태의 특별한 양태일 뿐이다. 돌도 집도 나무도 해까지도 모두 다 사실은 동사다. 삶은 명사적 상태로 정지하려는 것을 동사화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새해'를 '새롭게 하는 해'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상태를 소유하는 것보다 새롭게 하는 동적 활동이 삶의 진실일 것이다.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없이 느끼는 '새로움'은 다 허구다. 허구를 피하고 진실에 참여하자. 탕왕의 세숫대야 리더는 보통 사람들보다 진실의 양을 크게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진실의 폐활량이 더 커야 한다. 리더의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런 요구는 더 크고 강해진다. 중국의 고대 은나라 탕왕(湯王)이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매일 사용하는 세숫대야에다 진실의 폐활량을 키우거나, 최소한 줄어들지 않게 할 요량으로 각성제를 새겨 넣었다. 《대학(大學)》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전한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삶이란 새롭게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우선 자신에게 각성시키려 애쓰는 통치자의 면모가 보인다. 수준이 높은 통치자의 자세다. 최고의 위치는 최소한 이 정도가 되는 사람이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성제는 찾지 않고 하나의 의견만을 붙잡고 멈춰선 채 고집스럽기만 하면 세상이 엉망진창이 된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에 부가한 자신만의 진실의 양, 이것이 공적 자리의 높낮이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 단어를 이리 자주 쓰는 데에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정도의 각성제는 진실의 양이 얼마인가로 약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탕왕이 세숫대야에 이 문장을 기록하면서 실제로 '진실'이라는 글자를 가장 앞에다 새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구'(苟)라는 글자다. '진실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완성된다. "구일신일일신우일신"(苟日新日日新又日新) "진실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지는 일에는 거짓이 없이 착실하고 철저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새로워지는 일에 진실해야 할까? 새로워지는 일이 생명 현상이고, 그 생명 현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쪼그라들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혁신은 상승하는 운동 새롭게 하는 일이 '혁신'(革新)이다. 자기를 가두고 있는 가죽이나 껍질을 벗고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생명 현상인 한에 있어서 새롭게 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긴 '진실로[苟]'의 의미이다. 당연히 '혁신'은 어느 단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하나의 과업이 아니다. 그런 과업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유기체적 조건 같은 것이다. 혁신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나 조직이 움직이는 생명 활동이지, 생명 활동과 달리 따로 하는 특수한 과업이 아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뱀을 들어 이 점을 알려준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 뱀은 일 년에 한두 번 허물을 벗으며 생명 활동을 한다. 그러나 뱀이 가시에 찔리거나 해서 상처를 입고 거기에 염증이라도 생기면 허물을 벗을 수 없게 되는데, 이런 뱀은 바로 다음 해에 죽는다. 껍질을 벗을 수 없게 되면 죽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생각에 갇혀서 사고와 의식의 신진대사가 멈춘 것을 니체는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 받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명 활동을 활발히 하는 정신으로서는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력은 분명히 사유의 활발한 신진대사 능력을 말함에 다름 아니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막혀 있을 때, 그것을 과격하게 뚫어서 다시 생명력을 복원시키는 일이 혁명이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막힌 상태 안에 갇힌 채 이리저리 수선만 피우는 일은 혁명이라 불리지 못하고 겨우 반항으로 취급될 뿐이다. 답답한 껍질을 벗어던져 새로운 생명 현상을 출현시키면 혁명이고, 답답한 껍질은 벗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소란만 피우면 반항이다. 혁명은 새로운 생명력을 주지만, 반항은 구태의연한 생명력으로 죽음의 시간을 아주 조금 연장시킬 뿐이다. 혁명은 진실의 언어가 채우지만, 반항에는 거짓말이 난무한다. 모든 생명 현상에 혁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의 혁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크다. 동물의 혁신은 반복하는 혁신이다. 할아버지 뱀이 허물을 벗듯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 뱀도 허물을 벗는다. 아버지 뱀이 하던 그대로 아들 뱀이 허물을 벗는다. 손자도 다르지 않다.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혁신에 혁신이라는 간판을 달아주기는 매우 아깝다. 인간의 혁신은 상승하는 운동이다. 더 나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적이고 의도적이며 인위적인 혁신이 혁신이다. 정부수립(건국)의 단계에서 산업화 단계로 상승하고, 산업화 단계에서 민주화 단계로 상승하는 것이 혁신이었다. 정부수립(건국)의 단계를 맴돌거나 산업화를 맴돌거나 민주화를 맴도는 일은 혁신이 아니다. 혁신할 실력이 안 돼서 껍질을 벗지 못하면 맴돌게 된다.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학생이 다양한 형태의 덧셈과 뺄셈만 하고 있으면, 덧셈과 뺄셈의 껍질 안에서 맴도는 것이다. 이 학생이 곱셈과 나눗셈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 혁신이다. 덧셈과 뺄셈을 하던 학생이 방정식을 풀 줄 알게 되어야 혁신이 지속되는 것이며, 방정식을 풀 줄 알게 되었다고 또 이런저런 방정식 안에서 맴돌면 혁신이 멈춘 것이다. 방정식을 넘어 기하학의 세계로 진입하면 또 이것을 혁신이라 한다. 우리는 덧셈과 뺄셈을 넘어 나눗셈과 곱셈을 거쳐 방정식을 지나 기하학까지 부단히 상승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런 혁신적 생명활동이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이 진실로[苟] 진행되는 모습이다. 부단 혁신만이 혁신이다. 혁신이 생명활동이기 때문이다. 탕왕은 새로워져야 한다는 뼈대만 말했지만, 니체는 탕왕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살도 붙여 말해준다.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어서 내용과 방향을 가늠하기가 더 쉽다. 니체는 뱀의 생명 활동을 껍질을 벗는 것으로 말하면서 바로 '의견을 바꾸는 것'과 연결시켰다. 또 '의견을 바꾸는 것'을 정신 활동의 근본으로 본다. 정신이라면 최소한 정해진 곳에 붙박이처럼 멈춰있지 않다.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 일인 대답은 정신 활동의 근본에 닿지 못한다. 껍질을 벗는 일이 아니라 정해진 껍질 안에 머무는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무장하여 지금 아는 것, 지금 멈춰 있는 곳의 '다음'으로 이동하려는 욕망인 질문이 정신의 근본을 구현한다. 질문에는 부단히 껍질을 벗으려는 욕망이 작동한다. 대답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혁신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질문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된 사람들만 혁신에 훨씬 부담을 덜 느낀다. 질문 자체가 혁신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을 해야 할 때 혁신을 주저하며 제자리를 맴돈다. 혁명해야 할 때 반항만 하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포장하며 제 자리를 맴돈다. 지적 훈련을 대답으로만 하다 보니, '의견을 바꾸는 일'보다는 한번 가진 의견을 지키는 것이 더 편하다. 그래서 대답하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과거를 살지 미래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 혁신이 바로 미래를 사는 연습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혁신보다는 제자리를 맴도는 일을 하느라 멈춰선지 이미 오래다. 새롭게 하는 일이 멈추면, 생명 활동이 멈추고 생명력이 고갈된다. 비효율이 쌓이는 것이다. 비효율의 두께가 효율의 두께를 넘어서면서 국가든 생명유기체든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낡은 사고의 껍질에 갇혀 있는 정신은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고 정신이기를 포기하며 파멸한다는 니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선진화의 길 인간의 혁신을 동물의 그것과 달리 상승하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지금 혁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산업화의 단계에서 혁신에 성공하여 도달한 곳이 민주화인데, 민주화에 도달한 이래로 여태 민주화를 맴돌고 있다. 혁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가 단단한 껍질로 변질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활동 능력을 가진 정신이라면 당연히 민주화의 변질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화 시대에 젖은 굳은 의견을 바꾸는 일에 주저하면 안 된다. 혁신의 정신을 차리지 않고 껍질에 갇혀 시간을 보내면 그대로 죽는다. 늦었지만 민주화 다음을 도모해야 한다. 선진화의 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이 혁신이다. 뱀보다는 높은 수준의 인간적인 혁신인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모든 구조를 뒤틀며 새로운 틀을 짜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이렇게 판이 뒤틀릴 때 상승하는 혁신에 성공한 나라는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지위에 올라서고, 그렇지 못하면 종속적 지위에 머무른다. 선진화를 향한 혁신다운 혁신을 도모하는 혁신적 도전 이외에 더 큰 일은 없다. 반항을 혁신이나 혁명으로 착각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하자. 새해가 밝지 않았는가. 헌 말 헌 몸짓을 벗고 새말 새 몸짓으로 상승하자.
최진석, 〈지금 우리의 혁신은>,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북루덴스, 2021, 216~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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