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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00] '상상력,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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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717회   작성일Date 23-05-17 11:03

    본문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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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00
    2023. 05. 01.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상상력>에 관한 것입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모두 우물 안의 이야기였다면, 우물 밖의 다른 곳을 향한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보자는 외침을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을 적대시 하지 않는 포용력도 중요한 통찰인 듯합니다. 아래에서 확인해보세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조건 속에서의 종속성을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 나아가며,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과감한 상상력의 도전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새말새몸짓이 만들어졌습니다. 새말새몸짓으로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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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변절이나 변화나 제 3의 길은 회색분자의 길로 치부되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바로 진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의 논리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는 진영에 있지 세계에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진리의 입법자가 아니라 진영의 진리를 대행하는 대리인으로만 존재한다. 능동적이거나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바로 종속적인 주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속성을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평생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종속성은 종속성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종속성으로 채워진 주체들이나 또 그런 주체들이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작용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한번 종속성에 갇히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운명 앞에 던져지는 것, 이것이 비극인 셈이다. 그래서 진영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다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넘보는 무모함 자체를 죄악시한다. 우물 안은 이미 진영이 되었고, 그 진영을 벗어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진영에서 공유한 논리와 맞지 않는 것은 다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일은 진영 안에서만 유효하다.

     

    변화도 진영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당연히 작은 변화에 만족하고 큰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우물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쪽으로 옮기고 또 오른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는 새 세상을 연 것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자신도 우물 속에 가두고 사회도 우물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는다. 그래서 한 번도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만을 살다 간다. 전술적 차원에만 머물다 전략적 차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우물 안에서 볼 때 우물 밖은 다른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불가능한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다.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다른 곳을 적대시하지 않는 포용력이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물 안에서 왼쪽, 오른쪽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우물 안에서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답’으로만 훈련된 사람들끼리 하는 진영의 교체를 우물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거나 새로운 우물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진영의 교체를 새 세상으로 착각하면 할수록 넓은 세상의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한쪽만 지키다가 속절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말할 것이다. 작아진 것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이런 우물 안 개구리들을 중국의 루쉰은 ‘아큐’라고 하면서 중국인의 종속성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루쉰은 과거에 갇힌 우물 안의 중국에서 왼쪽 오른쪽의 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이다. 대답에 더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최진석,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북루덴스, 2022, 234-236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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